열흘동안 걸어서 키질쿰 사막을 통과하다!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기 19] 도보여행 18일 - 사막이 끝나는 곳

등록 2008.12.26 09:26수정 2008.12.2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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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키질쿰 사막 마지막으로 사막이 펼쳐진다

키질쿰 사막 마지막으로 사막이 펼쳐진다 ⓒ 김준희


간밤에 같이 술을 마신 오따벡의 말에 의하면 이 식당에서 10km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식당이 있단다. 그리고 그곳에서 10km를 더 가면 경찰검문소가 있다고 한다. 그동안 가즐리-부하라 구간에 식당이 없다고 했던 트럭운전사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다. 부하라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손가락에 꼽힐만큼 큰 도시이자, 수많은 관광객이 붐비는 역사도시다. 그런 도시라면 당연히 그 외곽에도 작은 마을들이 있을 것이다. 마을이 있다면 쉬어갈만한 장소도 있을 테고 식당도 있을 것 아닐까.


나는 짐을 꾸려서 오전 8시에 출발했다. 술이 덜깨서 머리가 띵했지만, 물을 마시면서 사막을 걷다보면 땀이 줄줄 흐르면서 술기운도 모두 빠져나간다. 해장과 숙취해소에 이만큼 좋은 것도 없을 정도다.

내일 부하라에 도착한다. 오늘의 목표는 부하라까지 최대한 거리를 단축시키는 것이다. 걷다보니까 도로 한가운데에 알록달록한 것들이 잔뜩 떨어져있다. 저게 뭘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까 '헬로 키티' 캐릭터가 그려진 중국산 작은 수건이다.

내 배낭에는 수건이 하나밖에 없고, 그것도 그동안 제대로 빨지 못한 상태다. 수건 뿐 아니라 속옷과 겉옷도 그렇다. '모든 빨래는 부하라에 가서!' 이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빨래를 등한시해왔다. 부하라에 가면 할일도 참 많다. 밀린 빨래를 하느라 제대로 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도로에 떨어진 수건을 하나 챙겼다.

두시간 가량 걸으니 작은 식당이 또 나온다. 나는 그곳에 앉아 쉬면서 환타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트럭을 운전하는 젊은 친구는 나하고 똑같은 헬로 키티 수건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것을 도로에서 주웠다면서 지나가는 버스에서 떨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또 다른 친구는 내가 어젯밤에 저 아래 식당에서 술마시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세상 참 좁다. 하기야 사막 가운데로 길이 하나밖에 없으니 내 모습이 눈에 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식당 주인은 이제 볶음밥을 만드니까 그것도 먹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일어섰다. 특별히 배가 고프지도 않고, 오늘 중으로 최대한 많이 걸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때문이다.


사막 한 가운데의 묘비 앞에서

a 키질쿰 사막 사막의 묘비

키질쿰 사막 사막의 묘비 ⓒ 김준희


걷다보니까 사막 한쪽에 기념비 같은 것이 세워져 있다. 그동안 사막을 걸으면서 이런 기념비를 여러차례 보았다. 군인을 그려놓은 기념비도 있고, 일반인의 묘비도 있다. 이들은 이 사막에서 죽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죽었는데 여기에 묻고 기념비를 세워놓은 것인지 궁금하다. 아니 이 단단한 모래사막에 사람을 묻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 기념비에 그려진 주인공은 두 명이다. 한 명은 1959년 생이고 다른 한 명은 1989년 생이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두 1998년에 죽었다. 그해에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디서 구했는지 붉은 꽃도 두 송이 꽂혀있다. 이 사막은 죽은 사람을 기리기에 적당한 곳이다. 별다른 생명체도 없이 적막한 이곳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죽는 장소로 사막를 택하는 것도 꽤나 매력적이다. 영원을 향해서 열려있는 거대한 창문같은 사막에서, 그 영원을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불멸'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곳도 이 사막이다. 사막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그런 상상을 했을지 모른다. 소멸해가면서도 불멸을 꿈꾸는 상상을. '아침이슬'의 가사처럼 태양은 이 묘비위로 붉게 떠오른다. 이 사람들은 죽었는데 왜 나는 살아있을까.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우고 부지런히 걸었다. 저 앞에 경찰검문소가 보인다. 오늘은 현지인들이 준 정보가 유난히 잘 들어맞는 날이다. 검문소로 다가가니까 불룩한 배에 인상 좋은 경찰이 나를 손짓으로 부른다.

현지인들한테는 경찰이 부담스러운 존재일지 모르겠지만, 이곳 경찰들은 외국인에게 상당히 친절하다. 그동안 쓸데없는 일로 트집잡거나 까다롭게 검문을 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워낙 빈곤해보여서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 경찰도 그렇다. 여권을 훑어보고 몇마디 물어보고는 그만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마을도 있고 식당도 많단다. 드디어 사막이 끝난 것이다.

"모자 한번 바꿔 써 보자!"

경찰은 이렇게 말하더니 내 모자를 집어들고 대신에 자기 모자를 나한테 씌워준다. 주변의 다른 경찰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자고 말한다. 정말 재미있는 경찰들이다.

검문소에서 경찰과 함께 사진

a 경찰 검문소에서 경찰과 모자를 바꿔쓰고 한장

경찰 검문소에서 경찰과 모자를 바꿔쓰고 한장 ⓒ 김준희


검문소를 지나서 걸었더니 정말 식당도 계속 나오고 작은 마을도 있다. 황량하던 모래벌판이 염소가 풀을 뜯는 목초지로 변해간다. 어제까지 내가 사막을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주위환경이 바뀐 것이다.

덩달아서 내 발걸음도 힘이 난다. 사막이 끝났다, 고생도 끝났다. 나는 미친놈처럼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부지런히 걸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4시. 나는 작은 마을 입구에 도착해서 한쪽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았다. 마치 호텔처럼 보인다. 그때 내 앞으로 한 소년이 다가온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 건물 호텔이야?"

그런데 호텔이 아니란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가 다시 나한테 묻는다.

"잠잘 곳을 찾는 거야?"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갈등. 이 소년을 따라갈까. 좀더 걸을까. 나는 좀더 걷기로 했다. 현지인들 집에 가서 자면 그것도 나름대로 좋겠지만, 오늘밤 만큼은 혼자이고 싶다.

한 시간 가량을 더 걷고나서 길가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부하라 까지는 40km라고 한다. 재워달라니까 건물 안쪽의 평상을 가리킨다. 그 평상에는 만들고나서 한번도 세탁하지 않은 듯한 카펫이 깔려있다. 지저분하기는 서로 마찬가지다. 나는 그 카펫에 앉아서 고기국과 맥주를 주문하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사막의 밤을 그리워하다

a 부하라 가는 길 사막이 사라지고 목초지가 나타난다

부하라 가는 길 사막이 사라지고 목초지가 나타난다 ⓒ 김준희


사막이 끝나니까 시원섭섭한 감정이 생긴다. 처음 계획했던 것만큼 나는 사막의 매력을 충분히 만끽한 것일까. 사막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한낮에 1시간 동안만 혼자 사막을 걸어보면 알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없으니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걸어갈수록 멀어지는 지평선, 인정사정없는 뙤약볕은 사람의 욕구도 단순하게 만든다. 때가 되면 먹고, 밤이 되면 잔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사막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 밖에 없다.

때로는 무더위에 분통이 터지고, 탈진 직전에 이르기도 했지만 난 벌써 다시 사막이 그리워진다. 그건 아마도 사막이 나에게 주었던 극도의 단순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느꼈던 고요함과 적막 때문이다. 생각과 감각도 그렇게 변해간다. 오래 전에 예언자들이 모두 사막으로 들어갔던 것도, 그 안에서 일신교가 탄생한 것도 이제는 알 것만 같다.

사막을 떠나서 도시로 들어가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게 된다. 나의 의식은 그것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 반응하게 된다. 때로 이런 면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싶어서 떠나온 여행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막은 그런 자극을 최소화시킨다. 대신에 고독과 고요함을 준다. 나는 이제 사막을 떠나지만 앞으로도 많은 순간에 이 사막을 그리워할 것이다.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이 지긋지긋할 때,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는 것이 지겨울 때, 쏟아지는 수천만개의 별이 보고 싶을 때,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 나는 아마 우즈베키스탄의 키질쿰 사막을 떠올릴 것이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걷던 한낮의 시간을, 맥주 한 병을 홀짝이면서 사막의 어둠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 밤을,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던 모래벌판에 홀로 서있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사막이 마련한 최고의 선물은,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 사막을 그리워하게 했다는 점이다. 사막은 끝났다.

a 사막이 끝나는 곳 이 식당에서 하룻밤을 잔다

사막이 끝나는 곳 이 식당에서 하룻밤을 잔다 ⓒ 김준희

#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도보여행 #키질쿰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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