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5월의 히로토 아키라 씨히로토 씨는 해군육전대 장교로서 50명 규모의 분견대를 지휘했다.
박광홍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어진 상황에서도,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해안진지 구축은 계속 진행됐다. 완전히 토벌하지 못한 섬 중앙부의 중국군 잔존세력 역시 일본군에게 있어서는 큰 부담이었다. 하이난 섬을 완전히 통제할 여력이 없던 일본군은 중국군 잔존세력과 비공식적으로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산발적인 교전은 계속되었다. 히로토씨 역시 적의 매복에 걸려 위기에 빠졌던 적이 있다. 이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서 미군이 상륙한다면, 양쪽으로부터 협공 당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히로토씨가 해안진지 공사 감독을 위해 출장을 나간 사이에 그의 부하가 부대에서 소총 3정을 들고 탈영해 중국군 진영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탈영한 부하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 출신의 청년이었다. 타이완 사람이지만 히로토씨와는 친밀한 관계를 이어오던 부하였기에, 그 탈영 소식은 그에겐 크나큰 충격이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상급부대에 보고를 올리던 그 때, 그에게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의 항복 소식이었다.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각오를 세웠을지언정, 조국의 패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는 일본의 항복 소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망함을 느꼈다. 주변 장교들 중에는 '패전을 인정할 수 없다'거나 '항복은 천황폐하의 뜻이 아닐 것이다'라며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단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타이완 출신 부하의 탈영 사건은 완전히 사소한 일로 치부됐다.
패전 직후, 히로토씨는 일본인과 중국인의 경계에서 방황하고 고뇌했을 타이완 출신 부하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태어나 일본인과 다름없이 일본어를 구사한들, 그것이 타이완인들에게 강요된 모순의 경계를 허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한 그 시점에서, 곧 중국으로 귀속될 타이완 출신의 사람들은 새롭게 살 길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타이완인 부하의 탈영사건에 대해 언급하던 히로토씨는, 인근 부대에 있었던 한국인 병사의 탈영 사건도 기억해냈다. 타이완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들 역시 식민지인으로서 마주해야 하는 모순된 현실에 고뇌했으리라고 히로토씨는 생각한다. 특히 그는 한국인들이 타이완인들과는 달리 식민통치 이전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지녀왔던 점을 들어 말했다.
"한국인들에겐 모욕적 처사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