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덴카이의 시제기시덴카이는 기존의 일본군 전투기보다 대폭 향상된 성능을 보유한 덕에 미군과의 공중전에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양산이 시작된 시기가 이미 전쟁 막바지였고 생산량 역시 턱없이 부족했던 까닭에, 전쟁의 향방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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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고 잊힌 소년
이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타니씨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자신의 임무에 열과 성을 다했다. 기존 일본군 전투기보다 대폭 성능이 향상된 시덴카이(紫電改)를 생산하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 긍지이자 한줄기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황은 일부 무기체계를 개선한다고 역전시킬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일개 노동자 고타니 씨의 노력으로는 거대한 전쟁의 흐름을 역류할 수 없었다.
1945년 3월에 우즈라노 비행장이 처음으로 미군의 공습을 받게 된 데 이어,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7월에는 위협적인 공습이 잇따랐다. 결국 안전을 위해 공습 대상인 비행장으로부터 소개됐던 고타니씨는, 다시 비행장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조국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된다. 예상치 못했던, 믿고 싶지 않았던 비보였다.
고타니씨는 그대로 길을 잃었다. 이미 나라는 전쟁에서 졌기에 자신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방황 속에서 즉각 비행장으로 복귀하지 않았던 것은 크나큰 패착이 됐다. 뒤늦게 우즈라노 비행장으로 돌아갔을 때는, 공습과 패전의 혼란 속에서 고타니씨에 대한 기록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패전 직후 비행장의 공장 노동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결국 마지막 급여뿐 아니라 전후 보상의 대상에서까지 제외되고 말았다.
그 회한이 고타니씨 인생의 향방을 좌우했다. 우즈라노 비행장의 잊힌 노동자는, 사람들로부터 잊힌 우즈라노 비행장을 떠날 수 없었다. 우즈라노 비행장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돼버린 소년은 다시금 힘을 쥐어짰다.
고타니씨와 같은 체험자들의 증언과 관련 기록들을 수집하며 우즈라노 비행장의 역사를 25년 이상 연구해온 우에타니씨는 비행장의 정비와 복원에 힘을 쏟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는 곧 이 세상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란 무엇인지, 평화의 가치가 어째서 소중한 것인지를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요? 풍화되고 잊혀가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미래의 평화를 위해 참으로 중요한 작업입니다."
우즈라노 비행장에서 다시 전투기가 날아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럴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즈라노 비행장이 일본인들에게 갖는 가치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무거워 보인다.
우즈라노 비행장의 버려진 활주로에서, 나는 과거로부터 미래로의 '기억의 계승'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