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언론' <오마이뉴스>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진지한 답변을 기대한다

등록 2003.05.16 17:43수정 2003.05.1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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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게릴라들의 뉴스연대를 표방하는 '진정한'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양식있는 독자들은 어제, 오늘에 걸쳐 아주 당혹스러운 하나의 질문과 마주친다. 넓게는 "<오마이뉴스> 이래도 되는 거야?"로부터 좁게는 "이게 메인 탑에 올릴 만한 수준이 되는 기사냐?"라는 의문에 이르기까지.

이 돌발적인 상황을 두고 <오마이뉴스>의 게시판은 밤새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가 불편한 관계에 있는 특정 세력이나 특정인에게 '시민기자제'란 방패막이를 내세워 의도적으로 도발을 한 것이다, 는 견해는 물론 심지어 '철없는' 모기자를 매장하려는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의도가 깔렸다는, 희화화된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다.

물론 문제가 된 기사나 <오마니뉴스> 편집부에 대한 질타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특정 정치세력이나 특정인에 대한 비판 내지는 비난 역시 그 틈바구니에서 '오래된' 불편함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본 기자 역시 그 와중에 문제의 시발점이 된 기사에 '급조된' 비판의 기사를 올렸고,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오마이뉴스> 편집부가 의도하는, '공평함'이라는 면죄부를 주는 들러리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고, 왜 이런 일이 발생하였는가? 기자 뿐만이 아니라 게시판의 많은 독자들이 <오마이뉴스> 편집진에게 문제제기를 하였음에도 아무런 해명도 없는 상태다. 편집부는 그저 한 때의 '해프닝'처럼 잊혀져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대답을 맡기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나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기자는 문제가 된 진중권씨의 <한겨레> 특집기사와 함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올려진 배성록 기자의 글, 그리고 기자의 배성록 기자의 글에 대한 '비판' 기사를 한 자리에 올려 놓고 다시 한 번 이번 사태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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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진중권, <한겨레> 생일상 뒤엎다


먼저 문제가 된 진중권씨의 글을 보자(박스기사 참조).
어제도 말했지만 이 기사는 어제(15일)로 창간 15주년을 맞는 <한겨레>가 '이런 한겨레로'란 특집으로 마련한 코너에 실린 글이다. 신혜식,복거일,강준만,진중권,변희재 등 우리 사회의 좌우익을 아우르는 필진들에게 각자 생각하는 한겨레에 대한 충고 내지는 비판의 글을 '써달라고' <한겨레>가 원고청탁을 한 것이다.

사실 기자가 보기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천박한 수준을 드러내는 글조차도 <한겨레>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하고 있는 것이라 느꼈다. 물론 이 중에서 진중권 씨의 <한겨레>에 대한 비판은 다른 필진들에 비해 신랄하고 냉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비판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시하기 힘든 진실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실'이 아니라 과도한 '비판'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어떤 형태로든 더 나은 <한겨레>를 위한 밑거름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론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별다른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 그것이 진지하고 성숙된 토론의 자세를 갖추었을 때라는 '단서조항'이 따라붙겠지만 말이다.

진중권씨의 글을 보면 현재 그가 <한겨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증'의 핵심은 다음 문장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요즘 <한겨레>가 자처하는 진보성의 본질(?)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한다. 선거와 관련이 없는 한에서 <한겨레>의 지면은 온갖 종류의 진보적 담론으로 풍성하다. 하지만 그 담론들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순간에 이 신문의 진보성은 철저하게 민주당이라는 새장에 갇혀 버리곤 한다. 나는 그런 경우를 여러 차례 본 것 같다. 최근 신임 사장의 취임과 함께 <한겨레> 내에서도 그 점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고 들었다. 앞으로 '민주당 기관지' 소리 안 듣게 하겠다고는 하나, 솔직히 그 다짐이 내게 그리 미덥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한겨레> 창간 당시 이 땅의 민주세력들이 가졌던 보편적 감성, <한겨레>가 진보세력을 대변해주고 노동자 농민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해주리라던 희망이 어느 순간부터 무너져버리고, 주류 언론의 시스템에 동화되기 시작하면서 <한겨레>가 보수야당인 민주당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사례들을 진중권씨는 그간의 <한겨레> 지면에서, 혹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인용해 가며, 창간 15주년을 맞은 <한겨레>에 자신의 표현대로 '가시돋힌 덕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중권씨의 견해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각 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할 부분일 것이다.

문제는 이 글에 대한 '반론'이라면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배성록씨가 글을 쓰고 <오마이뉴스> 편집부가 이 글을 메인 톱으로 배치한 것이다('관련기사' 참조). 이 글은 기자가 앞서 말한 성숙된 토론을 위한 '단서조항'이 왜 필요한 것인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배성록 기자의 진중권씨에 대한 '반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인 '팩트'와 가치판단, 감정을 완전히 무시한, 전형적인 배설욕구로 가득찬 글이다. 진중권씨를 비판(?)하는 기본적인 논거라든가 최소한의 논리적인 완결성마저 무시한다. A를 A'로 만들거나 심지어 B로 말했다고 주장하면서, 가차없는 비난과 욕설을 퍼붓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배성록 기자의 글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박스기사'와 '관련기사'를 보시면서 독자 여러분들께서 판단하시기 바란다). 어제 올린 기자의 글('관련기사' 참조)에서 잠시 언급한 이유도 있지만, 기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본질은 배성록 기자와는 별개의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배성록 기자의 글을 메인면 톱에 올린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의도가 무엇인가? 라는 데 있다고 본다.

기사의 도입부에서 언급된 여러 억측들, '관계가 불편한 특정한 세력이나 인물에 대한 의도된 도발'이라든가, '관심을 끌어 상업적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라든가, '순진한 기자를 매장시키려는 음모론'이라든가 하는, 이런 추측과 억측들에 대해서 <오마이뉴스> 편집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혹 편집부의 단순한 '판단착오'이거나 '실수'라고 한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런 대답일지라도 편집부는 어떤 형태로든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일개 '시민기자'의 글이기에 편집부에서 대답할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상투적' 대답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어제도 말했지만, 수많은 시민기자의 기사에 대한 최종 편집권은 분명 <오마이뉴스> 편집진이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이번 사태는 이전에도 간혹 언급되던 메인 톱에 올라오는 기사의 '경중' 문제와도 분명히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히 기사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한, 아니 갖추기를 '포기한' 기사였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대안언론'으로서 자리매김하고 발전해가는데서 어쩌면 이번 사태는 미구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더 큰 문제를 방비하는 보약이 될 수도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명확하게 해명하고 수긍하는 선으로 마무리된다면 말이다. 편집진의 성의있는 답변을 기대해본다.

낯설어진 <한겨레>

벌써 15년이 되었나? 창간호가 집으로 배달되었던 그 아침이 생각난다. 대문을 열고 바닥에 떨어진 그 알량한 분량의 신문을 집어드는 순간, 글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 그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닐 터, 그것을 묘사하는 데에 굳이 지면을 쓸 필요는 없을 게다. 어쨌든 그 날 이후 나의 아침은 늘 <한겨레>와 더불어 시작했으며, 이 신문이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지금도 실은 이 신문을 차마 끊지 못하고 있다.

이 집착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집착이 그 신문의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신문의 ‘과거’에 대한 추억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말하자면 일종의 미련인 셈이다. 어느 새 내게 <한겨레>는 그런 신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는 나 혼자만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공유하는 어떤 객관적 판단이다. <한겨레>는 낯설어졌다. 신문은 아침마다 열심히 배달되어 오나, 요즘은 펴보지도 않은 채 그냥 한쪽 구석에 쌓아놓는 일이 많아졌다.

요즘 <한겨레>가 자처하는 진보성의 본질(?)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한다. 선거와 관련이 없는 한에서 <한겨레>의 지면은 온갖 종류의 진보적 담론으로 풍성하다. 하지만 그 담론들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순간에 이 신문의 진보성은 철저하게 민주당이라는 새장에 갇혀 버리곤 한다. 나는 그런 경우를 여러 차례 본 것 같다. 최근 신임 사장의 취임과 함께 <한겨레> 내에서도 그 점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고 들었다. 앞으로 ‘민주당 기관지’ 소리 안 듣게 하겠다고는 하나, 솔직히 그 다짐이 내게 그리 미덥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노동당에 관심을 가져 준 것은 진보를 제 정체성으로 삼은 <한겨레>가 아니라, 외려 중도적 성향을 가진 <경향신문>이었다. 나는 당시 <한겨레>의 논조가 김민석의 당선을 위해 의도적으로 민주노동당을 배제하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인터넷한겨레의 기자는 서울시장 후보들을 소개하면서 이문옥 후보만 슬쩍 빠뜨렸다. 메일을 보내 그 연유를 묻자 “깜빡 잊고 그랬다”는 답변이 왔다. 물론 이 건망증은 사회당이나 녹색평화당 후보까지 세심히 챙겨주던 그의 각별한 자상함과는 잘 안 어울린다.

언젠가 ‘연평총각’이라는 네티즌이 인터넷에 서해교전에 관한 소설 한 편을 올린 적 있다.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작성된 그 글은 누가 봐도 작문이었다. 게다가 당시에 연평총각은 아직 신분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 그런데 인터넷한겨레에는 그 글이 버젓이 링크되어 있었다. 언론에서 이런 짓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비판했더니, <한겨레>에서 전화가 왔다. 나보고 서해교전에 관한 글을 쓰란다. 그럼 자기들이 반론을 하겠단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내가 글을 쓰면, 반론은 그것을 읽은 다른 필자나 독자들이 쓸 일이다. 언론사에서 자기들이 청탁한 글을 놓고 필자와 사운을 걸고 논쟁을 벌이겠다고 덤비는 해괴한 문화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한겨레>와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계기는 홍세화씨의 민주노동당적에 시비를 건 사건이었다. <한겨레>에는 노골적으로 민주당 편향을 보이는 기자들이 많으나, 적어도 홍씨는 지면에서 자기의 소속당을 홍보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한겨레>는 그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항의가 빗발치자 징계는 철회했지만, 기자의 당적 보유 문제는 기어이 ‘투표’에 붙여졌다. 이런 문제는 ‘다수결’에 붙이는 것 자체가 이미 다수의 폭력이다. 화가 나서 징계가 철회될 때까지 <한겨레> 기고를 거부한다고 했더니, 징계를 철회한 후에도 연락이 없다. 그런데 혹시 ‘길라잡이’ 필진에 변동이 생겼다는 사고(社告)는 냈는가?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한겨레>와 <오마이뉴스>에는 비슷한 내용의 만평이 실렸다. 한 마디로 권영길 후보의 선전 때문에 이회창 후보가 즐거워하고, 노무현 후보는 피해를 보고 있다는 영상 메시지다. 민주노동당이 그렇게도 못 마땅한가? 그럼 정면으로 비판할 일이다. 가뜩이나 대세론과 사표심리 때문에 늘 소수로 남도록 강요받는 진보정당을 도와주기는커녕, 옆에서 이렇게 비열한 공격을 퍼붓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 명색이 ‘진보’을 브랜드로 내건 신문에서 할 수 있는 짓은 더더욱 아니다.

배달호씨 분신 사건에 관한 <한겨레> 만평은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이 분신을 하고, 다른 편에서는 재벌들이 불평을 하고, 그 중간에 끼어 우리 대통령 각하께서 얼마나 난처하시겠냐는 것이다. 그의 자살의 동기가 된 월급의 차압과 재산의 가압류는 실은, 각하께서 언젠가 청와대에 앉아서 내리신 교시(노동자 파업에 민사적으로 대응하라)의 산물이었다. 노동자가 제 몸에 불을 지르는 상황에서도 각하의 안위가 걱정되는 그 만평의 시각. 그것은 혹시 그 동안 <한겨레>가 가져왔던 암묵적 시각의 명시적 노출이 아닐까?

갑자기 <한국방송> 사장 인선과 관련하여 노조를 비난하던 당시 여론매체부장의 글은 그냥 농담한 것으로 치고 넘어가자. 아마도 자신이 청와대 인사수석이라 착각한 모양이다. 노무현 당선자의 예방을 받은 기사가 자랑스레 신문의 1면에 오른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노 당선자는 현안에 관해 <한겨레>의 고견을 들으러 방문한 것이라 하나, 그게 대선 기간 중의 <한겨레>의 공로를 치하하는 예방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한겨레>의 고견이 그렇게도 듣고 싶으신가? 그럼 앞으로 어려운 발걸음 할 것 없이 그냥 <한겨레>를 구독하시라. 한 달 구독료 1만2000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한겨레>의 생일을 마냥 축하할 수가 없다. 외려 내가 사랑하던 <한겨레>의 스러짐을 깊이 애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생일을 맞아서 아무쪼록 창간정신으로 돌아가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라는 것. 이게 내가 생일 날 <한겨레>에게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덕담이다. 이 가시 돋힌 덕담에 <한겨레> 내부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고, 사랑이 큰 만큼 미움도 큰 법. 그 실망 속에서 기대를 보고, 그 미움 속에서 사랑을 읽는 역설을, 열다섯 살 된 소년은 이제 배워야 한다. / 진중권/인터넷한겨레 2003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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