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여중생 사건' 막을 수 없었나

[표창원 교수 기고 2] 법과 제도 미비가 비극 불러

등록 2005.04.22 16:51수정 2005.04.2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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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랜 기간 동안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려온 이양은 지난 15일 아버지가 숨지게 한 후 단짝 친구에게 "학교에 숟가락 꼭 챙겨가라"고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학교에 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이양이 친구들 몫으로 가방 속에 챙겨놓은 숟가락. 이양은 끝내 이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지 못했다.

오랜 기간 동안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려온 이양은 지난 15일 아버지가 숨지게 한 후 단짝 친구에게 "학교에 숟가락 꼭 챙겨가라"고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학교에 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이양이 친구들 몫으로 가방 속에 챙겨놓은 숟가락. 이양은 끝내 이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지 못했다. ⓒ 오마이뉴스 박상규


10여 년간 자신과 병든 조부모에게 폭력을 휘둘러 온 아버지를 살해한 강릉 여중생을 구명하기 위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피의자의 어린 나이, 힘센 성인인 아버지가 만취해 폭력을 휘두르던 상황 그리고 오랫동안 아버지의 극심한 폭력에 시달려 온 내용이 담긴 일기장의 공개 등 감정과 정서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아 선처를 바라는 네티즌의 호소가 줄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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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법대로 해야지 동정심에 호소해 법이 무시되면 어떡하나?"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인 여중생 그리고 유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어린 생명들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성원이나 호소와 더불어 이를 뒷받침하는 냉철한 논리와 분석, 그리고 대안 제시가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 국민의 상식과 느낌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이에 부합하는 정부와 사법부, 사회 각층의 대응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비극을 부른 법과 제도의 미비

우리나라에는 가정폭력방지법과 아동복지법이 있다. 바로 여중생 이양처럼 가장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며, 폭력 가장을 교화하고 치료해 바람직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개입하자는 취지로 만든 법이다.

이 법이 제 기능을 다 했다면, 아니 제대로 만들어지기만 했더라면 이번 사건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계와 학계,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생긴 이 법들은 그러나, 법제정과정에서 힘 있는 기관들과 단체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발톱 이빨 다 빠진 '종이호랑이'가 되었다.


의사, 교사 등을 '신고의무자'로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처벌조항이 없다. 미국 등 외국은 의사나 교사가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사실을 알게 된 후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과태료 처분 및 자격정지 등의 무거운 제재조치를 취하고 있다. 가정폭력방지법은 그 목적을 '가정의 보호'에 두고 있어 가해자 처벌이나 강제적인 행동교정은 아예 포기하고 있다.

아동복지법 역시 '강자'이며 '가해자'인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상담치료 등을 받을 수 있다. 일시적인 강제적 격리와 친권제한 조치가 가능하지만 집행 인력과 의지가 없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 폭력부모에게서 벗어난 아이가 지낼 수 있는 '위탁가정' 역시 신청자가 충분하지 않다.


결국 폭력부모에게서 학대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전혀 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임시 피난처 등에 잠시 맡겨졌다가 다시 전혀 개선되지 않은 그 부모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교사들은 학대받은 아동을 발견하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적도 없고, 학대받는 학생을 발견하고 지원하는 것이 '교사 본연의 업무'라 여기지도 않는다. 강릉 여중생 이양 역시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을 받아본 적이 없다.

'강자' 중심의 사법관행

예를 들어 힘센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부인과 어린 딸을 그 무시무시한 주먹으로 구타한다. 맞을 때마다 죽을 것 같지만 겨우겨우 살아나 간신히 회복하면 사과하고 잘 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술 마시고 부인이나 딸을 두드려 패던 중 가슴을 잘못 때려 사망한다. 그러면 우리 법은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개 '폭행치사' 나 '상해치사'로 판결한다.

반대로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부인이나 딸이 그날도 '이대로 가다가는 죽을 것 같아' 부엌에 있는 칼을 집어 들고 힘껏 찌른다. 그러면 '살인범'이 된다. 힘이 있어 상대방을 폭행할 능력이 있는 강자가 약자를 죽이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량인'폭행치사'나 '상해치사'가 되지만, 약자가 강자를 죽이면 '폭행할 능력이 없는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가장 형벌이 무거운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이다.

더구나 더 약자요 아랫사람인 딸이 행하면 '존속살인'이라고 해서 가중 처벌한다. 약자를 위한 길이 있다. 바로 '정당방위.'우리 형법은 자기나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행한 방어행위는 '정당방위'로 보아 처벌하지 않는다. 특히 '불안, 공포, 흥분, 당황해서 행한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라고 법에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문제는 '해석과 판단'이다. 어떤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검사, 판사 등 법조인들의 몫인데 대개 이 사람들이 다 남자고 강자들이다. '정당방위'를 인정하면 약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지위를 상실할까봐 두려운지 '정당방위'를 아주 좁게 해석한다.

지금까지 장기간의 극심한 폭력에 시달리던 부인이나 딸이 순간적으로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 공격하고 그 결과가 중상이나 사망에 이르게 된 때 '정당방위'를 인정한 예가 없다.

전근대적, 반인권적 수사절차... 그나마 현행법도 잘 안 지켜

이양은 이제 갓 형사처벌 대상인 만 14세가 된 어린 미성년자다. 영국 등 외국에선 '형사절차에 있어 청소년에 대한 특례법'을 통해 미성년자 피의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가 신뢰하는 보호자를 동석하도록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규정이 없다. 이양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우리에게도 '소년법'이 있지만 '보호자 동석 의무규정'은 없다. 형사절차를 통해 죄의 유무, 책임여부 등 사실관계와 법률관계를 명확히 따지고 조사하는 것은 당연히 그리고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또 다른 범죄의 피해자요, 정신적 심리적 충격이 큰 어린 소녀를 구속시키는 것도 모자라 성인 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교도소'에 가두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형사소송법 제70조는 구속할 수 있는 사유로 "주거부정, 증거인멸, 도주우려' 이 세 가지를 명시하고 있다. 스스로 112 신고를 하고, 자기 집에 있고(가까운 곳에 고모 등 친척이 있으며 어린 미성년자로 청소년 보호시설에 보호할 수도 있다), 심리적 충격에 휩싸인 14세 소녀 이양이 이 구속요건 어디에 해당하는가?

더구나 우리 소년법 제55조는 "소년(20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구속영장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발부하지 못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구속은 최소화하라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취지에 덧붙여 어린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구속하지 말라'는, 준엄한 우리 국가의 지시며 거부해서는 안 될 법의 절대명령이다.

구속영장 청구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 청구된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법과 국가가 내린 이 절대명령을 거역한 사유를 밝혀야 한다. 소년법 제55조는 또한 설사 구속한다 하더라도 미성년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다른 피의자나 피고인과 분리하여 수용하여야 한다"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 미결수 수용시설인 구치소도 아니고, 범죄혐의가 확인되고 형이 확정된 성인 범죄자들이 수용되는 '교도소'에 수감하고 있다니! 지역에 미성년자를 위한 별도 구금시설이 없다는 것을 '특별한 사정'이라고 할 텐가?

법에 정한 구속 장소를 갖추지 못했으면 불구속 수사하든지, 심리, 정신적 충격에 대한 진단과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시설이나 청소년 보호시설로 주거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고 수사를 진행하든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이제부터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

우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여중생 이양이 우리 현행법에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제대로 찾을 수 있도록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인권옹호자'요, '객관의무를 가진 자'이며 '판사와 동등한 지위'에 있는 '준사법관'이라 지칭하는 검사가 이양의 인권을 지켜주지 않는 것은 그 검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기소하고 처벌하는 검사에게 전권을 주고, 그 검사가 재판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편인 피의자, 피고인의 인권을 지켜줄 것이라 설득하고 강요하는 현 제도가 문제다.

현 제도 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능력 있고 의욕적인 변호사를 통해 현행법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이 두 가지 남아 있다.

첫째, 형사절차가 끝나고 난 뒤 상처받고 죄책감에 찌든 이양, 아버지라는 보호자를 잃고 친권자가 될 조부모마저 연로하고 병석에 든 이양에게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양과 유사한 처지에 놓인 수많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피해 어린이의 고통을 덜고 그들에게도 다른 친구들이 받는 최소한의 '보호, 양육, 관심, 교육'이라는 기본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개선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일시적 감정과 동정으로 바람처럼 일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묻혀지나가는 종전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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