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에 늦었다고 후회하는 딸

"매일 공부해도 부족하다" 자책... 딸을 지켜보며 내가 깨달은 것

등록 2024.06.01 18:06수정 2024.06.0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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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어려워하는 딸 ⓒ 김준정

 
서점에 갔더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였다. 오후 1시, 평소라면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시험기간이라 일찍 마친 모양이었다. 둘, 셋씩 짝을 지은 아이들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머리를 맞대고 책을 보고 있는 한 무리의 아이들 옆을 지나는데,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보는지 킥킥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솜털처럼 가벼운 그 소리에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책을 하나 골라 결제를 하고 서점을 나섰다. 서점 입구에는 아까 머리를 맞대고 책을 보던 아이들이 서있었다.      

"넌 어디로 가?"
"난 이쪽."
"그래. 잘 가."     


한 아이가 두 명과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나는 돌아서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친구들과 헤어져서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의 표정을 나도 모르게 살폈던 것이다. 아이는 커다란 문제집을 가슴에 안고 이내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아이의 뒷모습 너머로 가로수의 연두색 잎사귀는 바람결에 경쾌하게 춤을 추며 4월의 싱그러움을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아이가 카톡으로 동영상을 하나 보내온 게 있었다. 딸이 친구와 영상통화를 켜놓고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딸이 졸다가 책에 머리가 닿으려고 하자 친구가 "야!"하고 깨우는 장면이었다. 딸은 그 소리에 눈을 번뜩 뜨고 머쓱한지 씩 웃었다. 녹화를 한 시간은 새벽 3시였다.    

새벽 3시에 서로 깨우는 고등학생들

올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의 하루 일과를 보면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와서 야자나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었다. 수행평가나 숙제를 하느라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점점 피로가 누적되어 아이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앉고 하루종일 앉아 있어서 다리가 붓는 게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학교는 삼십 년 전,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 하나만 강요하는 상태에 박제되어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수행평가 폭탄으로 과거보다 더 숨 쉴 구멍이 없는 것 같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예전에는 공부를 안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다수 아이들이 공부를 한다는 것. 그것도 부모와 조부모의 조력을 받으면서 공부 하나만 매달린다. 그래서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하필이면 친구를 사귀어도 성적이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 바람에 아이가 더 의기소침해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 아이는 중학교 때 공부를 더 해두지 않은 걸 후회하는 말을 자주 한다.  
   
"매일 공부를 했는데도 시험이 닥치고 보니 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게 다 수학 때문인 것 같아. 수학 공부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겨울방학 때는 진짜 해야 했어."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나는 수학 과외선생이면서 이런 상황을 '강하게' 말해주지 않은 걸 자책하게 된다.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이가 수학문제를 눈으로 풀 때 해설을 써보라고 했고, 강의식으로 하는 학원보다 문제풀이를 교정해 주는 공부방을 추천했다. "겨울방학 때는 진짜 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때마다 받아들이지 않은 건 녀석이었다.      


강요를 하지 않은 건 맞다. 강제를 해서라도 말을 듣게 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사실 확신이 없었다. 아이가 영화감독이나 뮤지컬 배우처럼 나로서는 알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는데, 수학만 가르쳐온 내가 옳다고 판단한 것이 아이한테도 적용된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한 선택만이 경험으로 남는다고 생각했다. 지금 하는 잠깐의 후회도 그래서 하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삶의 한 부분이 될 거라고 믿는다.
    
이제 막 돋아난 연두색 잎사귀를 보면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다.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나무가 때가 되면 저마다 다른 열매를 맺는 게 신기하다. 매실, 복숭아, 사과, 배, 은행, 살구 등등 다양하기도 하다. 딸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은 마치 이 연두색 잎사귀 같다. 약하지만 싱그럽고, 그 안에 강한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것이 같다. 17살에 이미 늦었다고 후회하는 건, 어른들이 모두가 같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를 지켜보며 깨달은 것

아이를 지켜보면서 비로소 내가 교육받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세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그 빈약한 세계관 안에서 내가 얼마나 불안하고 열등감에 시달렸는지 그 시작점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나와 비교하느라 진심으로 축하하고 위로하지 못했던 시간들, 함께 있어도 마음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었던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노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안에 자라난 동기로 노력을 하면 성장을 하지만, 남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노력은 스스로를 소모시킨다는 걸. 나는 이것을 마흔이 넘고서야 알았다.      

사십 대인 나는 글을 쓰면서 내가 맺을 수 있는 열매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다. 누구의 강요 없이 내 마음이 시켜서 내 안에 자라난 싹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내가 겪어온 이런저런 일이 나의 삶이라는 나무를 이루었고, 그만큼 풍성해졌으니까. 그 풍성한 잎사귀가 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도와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입시 #고등학교 #경쟁 #교육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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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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