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미국사는이야기>3

-나는 잠옷입고 도서관 갔다.

등록 2000.02.28 14:13수정 2000.02.2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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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옷 입고 도서관 갔다.


내가 빨래 개는 시간을 이용해 시청하는 유일한 한국 비디오테이프인 이홍렬 쇼를 보니까 '참참참'이란 코너에서 한 주제를 놓고 세대별 생각을 재미있게 나누고 있더군.
내가 잠옷 입고 도서관 갔다고 하면 글쎄 한국인들의 세대별 반응은 어떤 것일까?

60대 이상 노인들은 칠칠치 못하게 무슨 경망스러운 행동이냐고 꾸짖으실까? 20대에서 40대는 미국은 무조건 개방적이라는 잘못된 선입관과 성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도서관도 섹스방이 되어가나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
그러면 10대들은? 아마 그게 요즘 패션인가 보다고 말할 것 같은데.
전혀 유머 감각이 없는 내가 조크를 다 생각하다니...
좀 썰렁하긴 해도 큰 발전이다.

그러면 내가 정말 잠옷을 입고 도서관에 간 이유는?
그건 바로 파자마 스토리 타임(Pajama Story Time) 때문이었어.
파자마 스토리 타임이란 공공 도서관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이들이 꼭 책을 읽는 습성을 길러주기 위해 1년에 몇 번씩 들려주는 이야기시간이야.

저녁 식사 후 7시 30분쯤 온 가족을 초대하고 있는데 이 시간을 제대로 즐기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해.
첫째는 잠옷을 입고 간다.
둘째는 아이들이 잠자리에 안고 자는 곰 인형이나 베개, 그리고 간편하게 깔거나 덮을 수 있는 작은 담요 등을 가지고 간다.
셋째는 마음속에 동화의 나라를 만들고 모든 것을 잊는다.

파자마 스토리 타임 방이 그대로 침실이 되는 거야. 잠옷, 혹은 편안한 실내옷차림으로 바닥에 쿠션이나 베개를 놓고 비스듬히 기대거나 아니면 엎드리거나 아예 드러눕거나 자유스럽게 자세를 잡지. 그러면 어린이 프로그램 담당자가 그날 주제에 맞게 선정한 대 여섯 권의 책을 읽어주지. 중간중간 노래와 율동도 하고 예산이 넉넉한 도서관에서는 만들기 시간과 함께 간단한 스넥을 제공하기도 해.


큰 애가 두 살반 때부터 도서관 출입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동안 파자마 스토리 타임에 잠옷입고 꽤 들락거린 셈이지.(사실 잠옷차림은 딱 1번, 그 외엔 잠옷에 가까운 실내복 차림)
여기 도서관에서는 사시사철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 특히 미국 문화에 익숙치 않은 이민자들은 잘만 이용하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미취학 아동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는 2세부터 4세까지 대상으로 하는 랩 시트 스토리 타임(Lapsit Story Time, 엄마 무릎에 앉아서 듣는 이야기 시간이라는 뜻), 4세부터 5세까지 대상으로 하는 프리스쿨러 스토리 타임(Preschooler Story Time, 유치원생들을 위한 이야기 시간)이 매주마다 열리고 있고 인형극도 자주 보여주는 편이야.


취학 아동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주로 방학중이나 부활절, 할로윈 데이와 같은 특별한 절기에 맞춰서 하고 학기 중에는 숙제를 도와주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여기 도서관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것 말고도 시민들을 위해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고 있어. 노인들을 위해 미국에서 해마다 이맘때쯤 꼭 해야만 하는 다소 복잡한 세금 보고서 작성을 도와주는 프로그램도 있고 각종 지역 문화 세미나나 토론회도 열리지.

나는 필사적으로 거의 전쟁처럼 도서관 들락거려 그 덕을 좀 보기는 한 것 같다.
우리 둘째 녀석은 큰 아이에 비하면 TV나 컴퓨터를 더 좋아하는데 그래도 잠 잘 시간만 되면 "I can't go to sleep without books."하면서 졸라대는 것을 보면.

자, 그럼 도서관은 그렇다 치고 학교에도 잠옷 입고 간다고 하면 한국사람들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지난달에는 큰 애 학교에서 '독서의 밤'(Reading Night)을 한다고 잠옷을 입고 오라는 거야. 서둘러 저녁을 해먹고는 아이들에게 잠옷을 입히고 위에서 이미 말한 이런 저런 것들을 잔뜩 챙겨서 학교로 갔지. 물론 나도 잠옷을 입지는 않았어. 그래도 아이들 학교에 가는 거고 학교가면 담임선생님도 만나는데 생각해봐 어떻게 잠옷을 입고 가겠나. 그래서 모이기로 한 카페테리아로 들어섰는데 순간 나는 저절로 눈이 똥그래졌지. 선생님들이 모두 잠옷을 입고 있었거든 신발도 모두 슬리퍼 차림이고. 큰 아이의 담임선생님도 민트색 파자마를 입고 반갑게 딸아이를 맞으면서 "네가 여기 와서 참 기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니? 학부모들도 물론 다는 아니지만 더러 잠옷 차림으로 오기도 했고.

그 날 나는 10년을 미국에서 살아도 한국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소 멍한 저녁을 보냈어.
미국이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 그게.
아이들에게 책읽기에 대한 중요성과 습관을 들여주기 위한 그 한가지 목적에만 최선을 다한다는 것. 한쪽에서는 미국의 대표적인 속옷 회사인 빅토리아 씨크릿(Victoria Secret)이 요란하게 잠옷과 속옷 패션쇼를 열며 남성들의 눈을 한껏 즐겁게 해주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선생이고 학부모고 남자고 여자고 잠옷을 입고 모여 앉아 책을 읽는 거야.
앞서간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틀에 박힌 내 사고의 전환에 큰 도전을 주는 사건이었다.
그날 밤 일은.

덧붙이는 글 | 다음이야기는 "기를쓰고 도서관에 가는 이유"

덧붙이는 글 다음이야기는 "기를쓰고 도서관에 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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