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미국 사는 이야기>7

화이트데이? 생일도 힘들지.

등록 2000.03.15 14:41수정 2000.03.1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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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데이?
10년만에 들어보니 많이 낯설다.


10년 전 노량진 역전 근처에 있는 뉴코아백화점(이름이 맞는 지 모르겠네)에서 발렌타인데이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산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떠오르네.
미국 온 사이 10년만에 한국에는 일년에 하나씩 늘어났니? 무슨 데이가 그렇게 많아?
화이트데이는 그 때도 있었지만 3월부터 12월까지 꽉 들어찼네. 무슨무슨 데이가.

여기는?
화이트데이란 건 없지.
잘 알고 있겠지만.
오마이뉴스 기사에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 놓았더군.
요즈음 한국엔 온통 사탕세상이 너울거렸나보지? 사진을 보니까.

여기는 캔디나 초콜릿들은 아이들 학교파티용으로 더 잘 팔리고 성인용은 단연 꽃과 속옷이지.
발렌타인 데이가 가까우면 빅토리아 시크릿을 비롯한 각 매장의 속옷 광고가 요란하다. 꽃과 향수, 보석류도 잘 팔리고.
그래도 발렌타인 데이가 낳은 아이들.
화이트 데이는 아직 없다.

무슨 날을 상업화하는 기술은 여기도 뛰어나지만 거기는 아주 날아가는구나. 여기도 1년 동안 백화점 특별 진열대를 한바퀴 돌다 보면 일년이 금방 달아난다.

1월 신년맞이를 위한 호텔룸 계약 광고가 거리에서 사라질 즈음 곧바로 진열대에는 발렌타인용 초콜릿과 캔디, 카드와 꽃이 자리를 메우지.


발렌타인 데이가 지나면 부활절을 준비하는 이스터 에그(easter egg)와 토끼, 역시 캔디가(여기 사람들 단것 좋아하는 것은 정말 못말려) 줄지어 진열대로 올라가.

바로 그 사이 이번주에는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가 있어. 3월 17일 금요일이지. 아일랜드의 첫 번째 주교였으며 사망후 아일랜드의 수호성자가 된 세인트 패트릭스를 기념해 만든 날인데 아일랜드 출신들의 축제일이라고 할 수 있어. 초록색 옷들을 입고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해.


어쨌거나 부활절이 든 4월을 보내면 바로 어머니날과 아버지날.
여기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이 따로 있다.
어머니날은 5월 둘째주 일요일.
아버지날은 6월 셋째주 일요일.
그렇지만 여기 사람들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생각하나봐.
어머니날이 100 이라면 아버지날은 한 60 정도 되는 것 같다.
어머니날을 앞두고도 꽃과 여러가지 선물, 주로 보석류나 화장품, 가정용품 등의 광고지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녀.

그렇게 6월이 저물려고 하면 금새 성조기가 백화점 여기 저기서 휘날리고.
7월 4일이 독립기념일이거든.
독립기념일에 제일 잘 팔리는 것은 뭐 같으니?
폭죽과 나들이 용품이지.
이 날 밤에는 도시마다 불꽃놀이가 장관을 이루고 따라서 동네 아이들 폭죽 터뜨리는 소리도 꽤 시끄럽게 들려온다.
근데 웬 나들이용품?

5월에 있는 현충일 연휴도 연휴지만 독립절 연휴가 바로 휴가철 피크거든.
상점에 진열된 접는 의자, 피크닉 백에 예쁘게 담긴 피크닉 용기가 자연으로 나가자고 한껏 유혹을 하지.
그 다음부터는 한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물놀이용품과 휴가용품 세일로 북적대다가 가을을 맞게 돼.

가을이 되면 추석도 없는 여기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고.
10월말 할로윈 데이가 가까워 질 때까지는.
지난해 한국신문을 보니까 요즘은 거기도 할로윈 데이가 있나보던데.
기사를 읽으면서 참 많이 어색했다.
미국 명절이 왜 거기 가있나 해서.
여기는 추석도 없는데.

갖가지 희한한 복장으로 거리를 누비며 캔디를 얻는 아이들 사이를 지나 11월이면 추수감사절을 맞는다.
이 날엔 텁텁한 칠면조 요리와 햄을 먹고 옘이라는 달디 단 고구마 요리와 옥수수 등을 먹지.
전통적으로 이 날만큼은 가족이 모여(특히 타 주로 공부하러간 대학생 자녀들도 이 때가 되면 대부분 집으로 돌아온다) 칠면조 요리를 먹는 날인데 이젠 그것도 한 물 가고 있다.
지난해 여기 신문을 보니까 칠면조 판매량이 줄고 있다더라.
대여섯 시간씩 지켜 서서 오븐에 구워야 하는 칠면조 요리대신 이제 간단한 외식이 늘고 있다나.

12월에는 성탄절.
추수감사절부터 시작되는 여기 성탄절 샤핑은 정말 알아주어야 해.
신문과 방송은 연일 샤핑에 대한 보도로 사는 이들과 파는 이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고.
미국인의 일인당 평균 샤핑 액은 750달러라는 수치도 나왔지.
작년에는 자녀들 선물로 아이들의 인지도가 높은 맥도날드나 코카콜라 회사의 주식을 사 주라고 권하기도 하더군.
직장동료에게 가장 알맞은 선물은 선물권이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렇게 그렇게 진열장이 바뀌는 동안 우리는 또 한 살을 먹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살려니까 그 절기나 명절이라는 것도 제대로 못 찾아먹고 사는 것 같아.

미국 명절이 뭐 그렇게 살갑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월대보름이나 구정, 추석 등 한국 명절을 꼬박꼬박 지키며 살만큼 한가로운 사람들도 많지는 않지.

그래도 요즘은 한인회나 평통자문위원회 등 무슨무슨 회들이 모여 민속의 날 잔치도 하고 한국학교에서는 송편만들기를 흉내내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데는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아이들 차지.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고국 전화 한 통으로 끝내는 수가 많아. 나도 그렇고. 지난해 새로 이민오신 분이 있는데 여기서 처음 맞는 추석이 너무 서러워서 많이 우셨대.

우리는 추석과 관계없이 따로 볼 일이 있어서 집을 비웠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기 너무 섭섭해 같이 저녁 먹으려고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안길래

'그렇겠지. 그 집도 어디 추석 쇠러 갔겠지. 우리만 이렇게 외롭게 저녁을 먹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까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나.
결국 윗집에 사는 유고슬라비아 가족을 불러내서 저녁을 드셨단다.

그래, 여기서는 화이트데이는 커녕 자기 생일 찾아 먹기도 사실 쑥스러운 구석이 많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고 확실히 찾아 먹을게 없는 기분, 뭐 그런 것.

그래서 내 친구하나는 모든 비밀 번호를 자기 생일로 만들었다.
남편이라도 자기 생일하나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근데 남편 뿐 아니라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
무슨 번호든지 0330이니까.
가만있어봐. 그 친구 생일이 가깝네.
올해는 그 친구 생일이라도 확실히 찾아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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