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개인의원 폐업하고 보건소 의사 된 이유

등록 2000.08.21 09:03수정 2000.08.2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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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를 찾아오는 환자들이 너무나 많아 요즈음은 의료대란으로 4일에 한번씩 밤당직, 주말당직을 하는 형편이다. 의사로서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요즘 나는 진료중엔 현기증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입술에는 피곤할 때 생기는 단순포진이라는 물집이 생겨 터지는 등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다.

몇달 전만 해도 나는 의약분업이 시작되면 더 이상 개인의원을 운영하는 일이 힘들 것이라 생각해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갖기 위해 컴퓨터를 비롯한 다른 공부를 할 생각으로 폐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보건소에서 의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낸 것을 보고 응해 두달 전부터 보건소 의사가 되었다.

부구청장이 주관하는 면접에서 보건소 일은 봉사라는 말을 듣고 나는 봉사를 좋아하여 IMF 때는 실업극복운동본부에서 부탁하는 실업자들을 본인부담금을 받지 않고 치료해주었으며 돈을 잘 벌었던 수년간은 사회를 위해 상당한 돈을 쓰는 등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고 했다.

또 보건소에서 주는 월급이 적다기에 나는 그 동안 의과대학 교수인 남편과 함께 모은 재산이 부부 공동명의로 등록되어 있어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평소에 환자가 많아 200명 내지 300명인데 오전엔 2명의 의사가 진료하고 오후엔 나 혼자서 진료해야 한다기에 그 말엔 솔직히 겁이 난다고 했다. 나는 개업해서 가장 많은 수의 환자를 진료했던 때의 환자 수가 120명이었고 보통 50-60명 정도였다가 의료환경이 점점 변하면서 최근엔 10명 내지 20명 정도의 환자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선 일을 해보고 너무 힘들면 의사를 더 뽑아 달라고 요청해야겠다고 말했다.

보건소에서는 오래 근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일은 많고 월급이 적다며 의사가 금방 사표를 내는 것이 걱정이었던지 일이 어려워도 금방 사표를 내지 않고 의사를 더 뽑아달라고 요구하겠다는 내 답변에 면접에 참여했던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는가 묻기에 보건소에 결핵환자가 얼마나 오는지 물어보고 북한에 결핵환자가 많다는데 보건소에서 결핵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배워 앞으로 남북교류가 있어 보건소 의사들도 교류하게 되면 나도 북한의 결핵환자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면접관들의 마음에 드는 말이었는지 모두들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데 와서 일해보니, 내가 맡고 있는 내과 일이 너무 많아 결핵실 일을 배울 틈이 없다.


취직하기 위해 나는 자기 소개서를 제출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다.

"저는...... 어려서부터 친구를 잘 사귀어 대인관계가 원만합니다. 대학 졸업 후 전라북도에 있는 전주예수병원 인턴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내과를 전공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인턴말기에 출산하게 되어 바쁜 내과를 전공할 수 없었습니다.

0-6세 특히 0-3세 사이의 초기 양육의 질이 인간의 운명(성격)을 결정한다는 정신의학 지식을 가볍게 여길 수 없어 의사로서의 사회적인 성취를 뒤로 미루기로 결심하고 점심시간에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고 저녁에 집으로 일찍 돌아가 아이를 돌보고자 시간이 가장 많이 허락되는 해부병리과를 택해 레지던트로 근무하다가 2년차에 그만두고 환자를 직접 볼 수 있는 일반의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1985년도에 미국 의과대학에 연구원으로 가게 되자 부인비자로 미국에 가서 1년반 동안 있으면서 공부하여 FMGEMS(Foreign Medical Graduate Examination in Medical Science)에 합격하였습니다.

저는 익산시에서 내과, 피부과, 소아과, 부인과의 일차 환자를 진료하였으며 진주에서는 산부인과 환자도 진료하였습니다. 루프시술도 계속 했습니다.

제가 보건소에서 일하게 되면 경험을 살려 주민들의 건강을 잘 돌보겠습니다."

며칠전 MBC TV에서 보건소에선 소아과 환자를 진료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내보면서 의료대란으로 소아과 환자들이 갈 데가 없다는 보도를 했는데 내가 일하고 있는 보건소에선 소아과 환자를 내가 주로 진료하고 있다.

폐경기 치료를 받고 있는 여성들에게도 처방해주고 피부과 환자도 진료하는 등 그야말로 내 경험을 살려 일을 잘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있는 나도 하마터면 의료의 현장에서 떠날 뻔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일하고 있는 보건소로 지원나온 공중보건의가 자신의 동료들이 나이가 더 들기 전에 다른 직업으로 전업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는 서울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은 내과 전문의이다. 우리는 분명 의료체계의 위기 속에 있다.

6월말에 첫번째 의사 폐업 사태 때 KBS TV에서 나와 내가 소아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하고 환자들이 너무 많이 와 의사 한 명당 200씩의 환자를 진료하느라 너무 힘들다고 한 내 말을 저녁 7시, 9시, 11시 뉴스에 내보냈다.

그런데 나는 의사 한명당 40명 이상의 환자를 보면 환자를 기억할 수 없는 등 진료의 질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 WHO가 의사 한 명이 하루에 4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지 말라고 권장하며 독일에선 실제로 개업의사가 보통 40명의 환자를 진료한다는 말을 하면서 우리나라도 의사가 많은 수의 환자를 진료하지 않아도 의원 운영이 되도록 의료보험 수가가 책정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었고 그 말을 하고 싶어서 TV 카메라 앞에 섰는데 방송국에서 그 말은 삭제하고 방송에 내보냈었다.

환자수가 많은 곳은 대형병원과 보건소이지 보통 개인병원엔 의사가 많이 배출되면서 내가 최근 몇년간 겪었던 것처럼 환자 수가 줄고 있어서 의과대학 정원을 줄이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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