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 우리는 과학만 배웠다!"

선생님 구명활동에 나선 이화외고 학생들

등록 2000.09.09 17:03수정 2000.09.1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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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외국어고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의 '무죄'를 증명하고 나섰다.

9월 8일 오후 6시 명동성당 입구에서는 이화외국어고등학교(이하 이화외고) 학생 400여명과 전교조, 대학생 등 총 600여명이 모여 '박정훈 선생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서울교육주체 결의대회'를 열었다.

수능이 68일 밖에 남지 않은 날. 고3이 포함된 이화외고 여학생 400여명이 명동성당에 모인 이유는 바로 이 학교 과학교사인 박정훈(35) 씨 때문이다. 박씨는 일명 '민혁당'의 '고등학교 사업책임자'라는 혐의로 지난 8월 23일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박씨가 민혁당의 조직원으로 고등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박씨가 국정원의 말대로 고등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쳤다면 배운 학생이 있을 것. 그런데 지금 박씨의 제자들은 말한다.

"빨갱이요? 우리 선생님은 주체사상과 공산주의가 아닌 삶과 과학을 가르쳤습니다!"

▲ 9월 8일 저녁 6시 명동성당 입구에 모인 400여명의 이화외고 학생들 ⓒ 노순택

국정원을 당황케하는 이화외고 학생들

박정훈 씨가 국정원에 연행된 것이 학생들에게 알려지자 이화외고 홈페이지(www.ewha-gfh.ed.seoul.kr)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선생님은 죄가 없다"며 학생들이 올린 글이 8일까지 무려 1000여건. 예상치못한 학생들의 행동에 국정원은 이 홈페이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 "우리 선생님 아무 죄 없어요" - 이승욱 기자

사이버 공간의 학생들의 열기는 날이 가도 식을 줄 몰랐고 급기야 현실공간으로 분출됐다. 9월 8일 금요일 수업이 끝나자 이화외고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채, 가방을 둘러매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친구 손을 잡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모인 학생들이 전교생 900명중 무려 400여명.


국가기구에 의해 연행된 선생님을 학생들이 돌려달라고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89년 전교조 사건 이후 11년 만에 처음이다.

▲ 명동성당 집회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전교조 소속 교사 ⓒ 노순택
이런 학생들의 움직임에 국정원은 당황했다. 국정원 측은 박씨의 부인에게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선생님에게 알몸수색, 관장 등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해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온몸을 날려서 작용과 반작용을 설명하던 선생님

이화외고는 여학교이고 박정훈 씨는 지구과학과 물리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여학생들은 대개 과학과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씨는 처음으로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수업을 했고, 프린트물이 싫다는 학생들의 건의에 모든 교재를 직접 만들었다. 또한 "작용과 반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온몸을 날렸"고, 심지어는 보름달을 학생들에게 좀더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학교 옥상에 천체 망원경을 설치했다고 학생들은 말한다.

또한 박씨는 학생들이 수업에 지치고 힘들 때면 '광야에서'도 한곡조 뽑을 줄 아는 교사였다. 인터넷에서 인기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다운받아 수업시간마다 틀어주며 학생들의 눈높이로 다가갔고, 서태지나 HOT의 노래로 갑갑해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달랬다. 그런 모습 속에서 학생들은 과목은 싫어도 선생님은 좋아하게 됐다.

ⓒ 노순택
같은 학교 교사인 홍진기(32, 생물)씨는 "평소 박 선생님의 생활을 본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은 국정원의 조사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학교 졸업생 엄예린(21, 고대 지리교육)양은 "선생님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열흘 전쯤 듣고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몸으로 증명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9월 8일 저녁 늦게까지 명동성당 입구에서 집회를 하던 이화외고 학생들은 구호도 잘 외칠줄 몰랐다. '님을 위한 행진곡' 등 흔히 집회에서 잘 부르는 어떤 노래도 잘 몰랐다. 대부분 집회에 처음 참석했던 학생들은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한가지는 확실하게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박정훈 선생님으로부터 주체사상을 배운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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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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