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소굴' 헌책방 문을 닫다!

금호동 <고구마>가 새로 문을 연 소식

등록 2000.11.02 10:29수정 2000.11.02 11:18
0
원고료로 응원
'개미소굴' <고구마>는 문을 `닫아가고' 있습니다. 그 좁디좁던 가게에 촘촘히 세워둔 이중책장과 한 사람이 몸을 비틀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던 그 <고구마>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새' <고구마>가 '옛' <고구마> 자리보다 10미터쯤 위로 올라간 곳 지하에서 움트고 있지요.

지난 10월 31일 5호선 신금호역에서 내려서 <고구마>에 갔습니다. <고구마>는 버스와 지하철로 갈 수 있는데 버스는 76번, 154번, 155번이 지나갑니다. 이 버스들은 연신내 쪽에서 옥수동 사이를 다니는 버스라 동대문이라든지 강남이라든지, 영등포라든지, 서울 안에서도 지하철로 갈 수밖에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오면 나가는 곳이 한 군데뿐이라 찾아가기는 쉽습니다. 지하철역 신금호역에 내리면 엄청나게 길고 긴 계단이나 자동계단을 타야 합니다. 그런데 맨 끝으로 가면 장애인을 생각해 만든 편의시설인 '승강기'가 있지요. 장애인 편의시설로 만든 승강기가 비장애인에게도 도움을 많이 주는 보기가 바로 지하철역 신금호역 승강기입니다. 무려 '지하 8층'에 있는 지하철역이기에 승강기로도 35초 동안 올라가야 합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파출소가 보입니다. 파출소를 끼고 오른쪽 언덕길로 갑니다. 이 길엔 두 옆으로 좌판을 깔고 여러 물건과 먹거리를 파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 올라가노라면 왼편에 첫째 <고구마>를 만납니다.

처음 만나는 이 <고구마>는 초중고등학교 자습서와 교과서만 갖춘 가게입니다. 초중고등학교 자습서와 교과서만 해도 부피가 엄청나죠. 그리고 이 엄청난 부피를 볼 적마다 지금 아이들이 얼마나 학교에서 시달림받는지 눈에 선하고요.

여기서 좀더 올라가면 이제는 '문을 닫는 <고구마>'를 만납니다. 엊그제 찾아갔을 때는 예 있던 책들을 거의 다 '새로 옮기는 <고구마>'로 가져간 때였습니다. 만화책과 잡지를 빼놓고는 모두 옮겨갔습니다.

쓸쓸하게 남고 텅 비어버린 책장을 사진 기록으로 몇 장 남기며, '이렇게 가게를 옮길 때 구석퉁이에서 나오는 보물'이 없을까 하며 책방을 좀 뒤져 봅니다. 1965년판 <표준 옛글>이 하나 보입니다. 60년대 학생들이 본 국어자습서도 두엇 보이는군요. 1956년에 첫판이 나왔던 교과서 <표준 옛글>은 이병기 스승과 정인승 스승이 엮은 책입니다. 대상자는 '남녀 고등 사범 실업고등 국어과 1,2,3용'이군요.


'사범고'는 지금으로 말하면 교육대학교입니다. 우리 아버지도 사범고를 어렵게 나와서 지금 교사살이를 하고 계시니 1956년에 첫판이 나오고 1965년까지도 그대로 나왔다면 아버지도 이 책을 보고 공부하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옛글'은 요즘 학생들이 배우는 '고문(고전문학)'입니다. 1950-60년대만 해도 좀 더 쉽게 가르치고 배우도록 교과서 이름도 '옛글'이라 했고 말들도 아주 쉽게 썼는데 요즘은 '고전문학'이 그야말로 '고문'으로 다가온다죠?

안쪽까지 들어가 보니 폐간된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마당>이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 같은 잡지는 이제 '옛책(고서)' 축에 들어가는 잡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이 녀석을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죠. 헌책방에서 <뿌리깊은 나무>를 2000원 아래로 살 수 있는 곳은 몇 군데 안 남았습니다. 책이야 나가면 다시 들어올 테지만 폐간된 옛 잡지는 쉽게 들어오는 편이 아닙니다.


<뿌리깊은 나무>를 기억하거나 어렴풋이 이름만 들어 본 분이라면 <고구마>를 찾아가 손수 이 낡은 잡지에 쌓인 더께를 닦아내고 지금도 빛이 초롱초롱한 글들을 읽어 보세요. 1970년대 유신 때나 2000년 김 대중 시대나 상황이나 사회가 그다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문을 닫는 <고구마>'에서 나와 '새로 옮기는 <고구마>'로 발길을 옮깁니다. 주인 아저씨는 어디 나가신 듯했고 아르바이트생만 두엇 보입니다. 지하로 내려가니 퍽 넓은 자리에 빼곡히 들어찬 책장이 두 눈에 다 안 들어옵니다. 계단 바로 앞에 있는 문고판부터 해서 열 칸 즈음 되는 천장까지 닿는 책장은 마치 구청도서관에 온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시립도서관 수준은 안 되어도 구청도서관 수준은 되고도 남을 만한 크기로 지하에 '새로운 <고구마>'를 준비하고 있군요.

그러나 이렇게 넓디 넓은 <고구마>에서 다른 책손님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장사는 어떻게? <고구마>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놓은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우편으로 받아보는 제도를 여러 해 동안 해오고 있습니다. http://www.goguma.co.kr 이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인터넷편지는 book@goguma.co.kr 과 bslee@goguma.co.kr 둘이 있습니다.

'인터넷 <고구마>'에 들어가 보면 꼼꼼하게 나누어 놓은 목록과 '찾아보기'와 '새로 들어온 책 목록'으로 굳이 책방에 가지 않고도 책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자기가 살 책을 은행계좌로 돈을 넣어서 받아 볼 수 있지요.

인터넷 홈페이지는 외대앞 <신고서점>과 대치동 <책창고>도 올려 놓고 있으나 '우편통신판매'가 중심인 곳은 금호동 <고구마>뿐입니다. 그래서 <고구마>에는 아르바이트생을 여럿 두고 있습니다. 정식 직원을 두지 못해서 아르바이트생은 퍽 자주 바뀝니다. 이런 대목이 큰 단점이 되긴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인터넷으로만이 아니라' '책방을 찾아와서 책을 뒤지는 헌책방 성격'까지 살리고자 좀 더 넓은 가게로 자리를 옮깁니다.

'새로 옮긴 <고구마>'는 정리가 끝나려면 11월 한 달은 넉넉히 잡아먹어야 할 듯합니다. 얼추 책방을 둘러보는 데만도 두 시간은 걸리더군요. 톱밥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로 짜 놓은 책장은 많이 비어 있고 아르바이트생은 부지런히 책을 날라다 꽂아둡니다. 전집을 둔 책장 앞에 서면 수백 권이 꽂힌 <어린이 마을>이나 <창비영인본>을 보며 혀를 내두를 만합니다. 박경리 선생이 1970년대에 처음 냈던 <토지> 열 권도 있습니다.

'새로 옮긴 <고구마>' 정리가 다 끝난 뒤에 찾아가시는 편이 가장 나을 테고 인터넷으로 뒤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옛 <고구마>'에서 '새 <고구마>'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두루 살펴볼 수 있게 이맘때 찾아가 보는 일도 좋습니다. 하나가 죽고 다른 하나가 새롭게 태어나는 <고구마> 모습. 새롭고 힘차게 거듭나려 아쉬움이 남아도 지난날 자기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 오랜동안 준비해서 비로소 고치를 찢고 나와 나비짓을 하려는 <고구마>에 한번 가 보세요.

덧붙이는 글 | 02) 2232-0406 / 팩스) 02) 2238-7259 / 011-222-7281
http://www.goguma.co.kr  / 서울 성동구 금호동 2가 92번지

* <헌책사랑> 소식지 12호를 냈습니다. 신촌 <숨어있는 책> 첫돌맞이 특집호를 냈습니다. 이 소식지를 받아보고 싶으신 분은 제 인터넷편지 주소로 연락해 주세요 *

덧붙이는 글 02) 2232-0406 / 팩스) 02) 2238-7259 / 011-222-7281
http://www.goguma.co.kr  / 서울 성동구 금호동 2가 92번지

* <헌책사랑> 소식지 12호를 냈습니다. 신촌 <숨어있는 책> 첫돌맞이 특집호를 냈습니다. 이 소식지를 받아보고 싶으신 분은 제 인터넷편지 주소로 연락해 주세요 *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4. 4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5. 5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