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고어와 부시, 1960년 닉슨의 선택을 주목하라

<주장> 미국의 민심이 용단을 촉구하고 있다

등록 2000.11.10 08:22수정 2000.11.1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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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 중대한 부정이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통령 선거 재검표를 마무리하는 데는 적어도 6개월은 걸릴 것이다. 그동안 상대 후보 당선의 적법성은 계속 의심받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미국의 대외 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줄 것이다. 나는 이 나라가 이 같은 상황으로 치닫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재검표를 요구하고, 그 결과 여전히 상대 후보가 당선되었음을 확인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에게는 '진짜 못난이'라는 낙인이 남은 정치 인생의 여정은 물론, 역사 속에 따라다닐 것이다."

독자들은 이 대목까지 읽고 이 말을 한 당사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화자가 지칭하는 상대후보는 조지 W. 부시가 아니라, 존 F. 케네디다. 따라서 화자는 앨 고어가 아니다. 리처드 닉슨 미국 전 대통령은 40년전의 1960년 미국 대선의 상황을 설명한 회고록(1978년 발간)에서 이 같이 말하고 있다.

주간지 타임의 칼럼니스트 프랭크 펠리그리니는 9일 이 같은 닉슨의 회고록 내용을 인용하며 "고어는 플로리다주의 재검표 결과, 여전히 근소한 차이로 부시의 우세가 굳어질 경우 다시 또 다른 쟁점-팜 비치 카운티의 투표용지 논란-을 이용해서 이 지루한 논쟁을 계속 이어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에 휩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문제가 된 1960년 선거를 보자. 당시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후보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가 격돌, 총 득표차이가 11만8천574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케네디는 뉴욕과 미시간, 텍사스같은 대형주에서 각 5%, 2.1%, 2%의 격차로 선거인단들을 독점함으로써 닉슨을 따돌리고 선거인단 투표 303 대 219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케네디는 이후 재임 기간중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 선거만 해도 미시간 주에서 존 F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이 마피아들을 움직여서 조직적으로 표를 동원했다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부정직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받은 닉슨은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이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등에서 낙선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은 후 68년 선거에서는 후버트 험프리 민주당 후보를 0.7%의 근소한 차이(43.4% 대 42.7%)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당시 선거인단수는 301 대 191여서 60년 선거 결과를 승자의 소속당만 바꿔서 재연한 결과였다. 혹자는 "68년 선거에서 닉슨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60년 선거에서의 석패에 대한 하늘의 보상"이라는 의미 있는 해석을 던지기도 했다.


다시 40년후. 이번에는 부시와 고어가 이 같은 '닉슨 딜레마'에 빠져있다. 미국 동부시간 9일 오후 6시 현재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가 3개 카운티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부시가 고어를 362표 앞서 있다. 앞으로 며칠 간 도착할 부재자 표의 상당수가 해외주둔 미군들의 표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 미군들의 대다수가 '강력한 국가 안보'를 옹호하는 부시에게 표를 던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부재자 표를 포함한다면 불과 수천 표의 차이로 부시의 당선이 굳어질 공산이 크다.

그래도 고어는 여전히 팜 비치 카운티에서의 투표용지 논란을 이용, 선거의 적법성을 물고 늘어질 수 있다. 미국 역사상 총투표에서 이기고, 선거인단 확보에서 진 경우는 12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총투표에서 고어가 이긴 선거이기 때문에 그가 고집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그 같은 주장이 비난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 같은 미국 대선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한 항의로 로드 아일랜드주의 대학생들이 "부시의 양보와 선거제도의 개정"을 요구하는 가두 시위를 벌였고, 민주당 성향이 강하다는 팜 비치 카운티 주민들도 9일 재투표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럼에도 고어와 부시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권을 놓고 이전투구를 보이는 모습에 대해 미 국민들은 절망하고 있다. 선거 다음날인 8일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우리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순간에 와있다"(고어),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고 있다(부시)"는 치사로 여유를 부렸다.

이 같은 '표정 관리'와는 달리 이튿날에는 "(상대방을 못 믿겠으니) 팜 비치 카운티를 비롯, 4개 선거구는 직접 수작업으로 개표하자.... 진상조사를 벌이겠다(민주당)", "우리가 이겼다고 확신한다. 정권 인수팀을 가동, 백악관을 접수하겠다(공화당)"는 말을 언론에 흘리며 서로를 흥분시키고 있다.

민주당 고위관계자들은 사석에서 "젭 부시(조지 W. 부시의 동생인 플로리다 주지사)가 일을 꾸민 게 분명하다"는 말을 던져 노골적으로 부시 진영을 비방하고 있다. 그들의 명분이야 어쨌든 이들을 지켜보는 미국인들과 세계인들의 눈에는 이들의 이 같은 행보가 '눈먼 대권욕'으로 비치고 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 는 8일 "마치 두 나라 사람들이 투표를 하러 간 것 같았다"고 민심의 분열상을 우려했고, '뉴욕타임스'도 "앞으로 누가 승자가 되든 어떻게 국정을 이끌 것인지 걱정된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부시가 "이 같은 논란 속에 대통령에 당선되는 걸 바라지 않으니 플로리다 주에서 재선거를 해서 정정당당히 심판받겠다"고 하거나 고어가 "근소한 표차이지만, 결과에 승복하고 4년후에 재도전하겠다"는 선언을 한다면 어떨까?

올해 고어와 부시의 나이는 각각 52세와 54세이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설사 백악관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번 선거에서 거둔 치열한 접전이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4년 뒤 선거에서 다시 강력한 대권후보로 부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아니 한쪽이 대권을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승자는 패자에게 쏠린 '절반의 민의'를 계속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들이 자신이 주장했던 '미국의 위대한 민주주의'를 세계 만방에 과시할 지 두고볼 일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소인배의 처신을 계속한다면, '자유민주국가의 큰 형님'이라는 미국의 자존심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힐 것이다. 세계는 새 천년에도 최강대국을 이끌어갈 이들 두 지도자의 용단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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