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속임으로써 세상을 속인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자신을 바꾼 사람들'를 읽고

등록 2000.11.29 12:55수정 2000.11.2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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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stors(사칭자들)'이라는 원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자신을 깜쪽 같이 속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왜 자신을 속임으로써 세상마저 속여야 했을까. 6가지 유형의 변신 혹은 사칭한 사람의 삶을 통해 사칭에 대해 사회심리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

대통령의 친인척이라거나 권력 실세와 막연한 관계임을 내세워 사기를 치는 사건을 종종 접한다. '나는 대통령과 무슨 무슨 관계다'라는 말을 내세우면 사람들은 이 사람이 자신의 민원을 해결해주거나 돈을 벌 수 있게 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전에는 이런 사기 행각이 있었다. 유수한 외모를 가진 한 50대의 남자가 자신을 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현직 교수라고 사칭함으로써 수십 명의 부녀자들을 농락하고 돈을 빼앗았다. 이 사건을 접하고서 수십 명이 어떻게 저렇게 감쪽같이 속을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상황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사칭이 왜 일어나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사칭하는 사람과 사칭 당하는 사람의 관계 속에는 현실의 자신을 부정하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확장을 꽤한 사람들

그렇다면 자신을 부정하고자 하는 욕망은 왜 생기는 것일까? 사칭은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확장할 수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자기 부정(파괴)은 곧 자기 확장인 것이다. 자신을 확장함으로써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무수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칭이 발생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권력과 권위의 힘에 의해 억압의 기제가 사회적으로 강하게 작용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는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때 사칭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의사였던 제임스 베리의 삶을 들여다 보자. 제임스 베리는 최초로 제왕절개수술에 성공한 탁월한 외과의사였다. 청결과 위생을 중시한 예방의학의 선구자였으며, 부패한 관료에 맞서 싸웠던 의료부문의 개혁자였다. 또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의술행위를 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의사였다.

그런데 그가 죽자, 남자로만 알려졌던 그가 아기까지 낳은 여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는 여자가 의사가 되는 길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로 사칭해야만 의사가 될 수 있었던 제임스 베리는 사칭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을까?


이 책의 지은이 사라 버튼은 그녀가 당시 여성의 지적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쳤다는 말을 한다. 여성은 지적 능력이 떨어져 의사가 될 수 없다는 사회적 의식에 대항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사라 버튼의 주장은 제임스 베리가 학위 논문의 서문에 썼던 "나의 젊음이 아니라 내가 남자의 지혜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라는 구절을 통해 입증한다. 어쨌든 외과의사 제임스 베리는 지금 남성들이 쓰는 역사에도, 페미니스트의 여성사에도 수록되지 못한 '잉여인간'으로 남아 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 기회 제공

여기서 제임스 베리의 사칭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기치는 것과는 구별돼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실력은 있지만 자격이 없어 사칭을 한 6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칭자들에 대한 평전이자 사칭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접근을 시도한 책이다.

제임스 베리 외에도 버팔로 차일드 롱 랜스, 베르디난도 왈도 데마라, 자바수의 카라부 왕녀, 헤리 도멜라, 루이 드 루즈몽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창조적이며 지적이었던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자신을 바꾸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모험가였으며, 현실 탈출의 탁월한 기술자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사칭이 들통났던 경우이고 보면, 최고의 사칭기술자는 아닌 셈이다. 최고의 사칭 기술자는 끝까지 들통나지 않았을테니까.

사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현실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내면 속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우리의 내면을 되짚어보는 기회를 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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