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게 오는 봄, 레드 오렌지 꽃은 필까?

<미국 사는 이야기 41>

등록 2001.02.22 10:24수정 2001.02.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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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입술이 마르지 않는다.
더 이상 입술이 마르지 않는다는 건 안 공기가 건조하지 않다는 것이야. 안 공기가 건조하지 않다는 건 히터 온도를 높이 올리지 않았다는 소리고. 그러니까 그건, 이젠 바깥 공기가 아주 차지 않다는 것이지.

하루에도 열두 번 구름지도를 바꾸어 가며 빌딩 사이사이를 칼바람으로 얼리던 시카고의 유난스런 겨울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건만 37년만의 기록적인 추위라고 엄살을 떨던 여기 애틀란타에 열흘 내내 비가 잦다.

그 비 몇 번에 거리엔 개나리가 제일 먼저 노랗게 봄을 그려오고 상점엔 노란 크림을 바르고 나타난 오레오 쿠키가 '스프링 컬러'를 먹고 싶은 아이들의 손에 집힌다. 오레오 속 노란 크림은 아이의 맘을 노랗게 물들이고 머리카락까지 그렇게 물들이고 싶어 저리 간지러워 하는가 했더니...

"엄마, 레드 오렌지."

지난 해 봄부터 가닥가닥 집어 노랗게, 발갛게 염색한 친구들의 머리가 예뻐 보였던 가연이는 종종 자기 머리도 예쁘게 했으면 한다고 말했었다.
"네가 쪼끔만 더 크면 엄마가 생각해 볼게."
그렇게 접어 놨던 걸 이제 '쪼끔' 더 컸다고 다시 펼치고 나온다.

"왜, 그걸 하구 싶은데."
"이쁘니까."
"엄마는 그거 안 해도 가연이 머리카락이 이렇게 이쁜데... 누가 그렇게 했어?"
"로렌, 엘리자베쓰, 제니"
모두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이다.
맞어. 한국에서 막 온 아이들의 머리를 보면 거의 염색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 잠시 다녀온 아이들도(어른도) 뭔가 달라졌다 하고 보면 머리 색깔이었지.

"그게 예쁘니?"
"응."
"그래, 그럼 엄마가 어떻게 하는 건지 배워서 해 줄게."
그리고 탤리한테 물었다. 혹시 할 줄 아냐고. 그이가 얼마 전에 머리색을 또 바꾸었거든. 그랬더니 탤리가 펄쩍 뛴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내 딸 같으면 절대로 못하게 할 거예요. 다시 생각해 봐요. 아이구 참, 염색하고 나면 다른 엄마들이 클레어(가연이 영어이름)를 보고 뭐라고 할지... 분명히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고 그럴 거라구요. 물론 나는 클레어를 잘 아니까, 머리카락 색깔을 좀 바꾼다고 해서 달리 보진 않겠지만. 그리고 나는 열린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미세스 존스 같이 전통적인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분명히 한마디씩 할 거라구요."

탤리는 자기 딸도 아닌데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학교선생님들과 동네 아줌마들이 "써튼 카테고리"(Certain Category)에 넣고 클레어를 볼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부모도 점잖지 못한 사람들로 볼 테니까 다시 생각해 보라고 극구 말린다.


"써튼 카테로리요? 어떤 카테고리요?"
"바디 피어싱 하고 문신 새기는 아이들 있잖아요. 그런 애들이 머리 염색하고 마약하고... 메리디쓰 알죠? 걔 엄마가 바디 피어싱 하고 다니잖아요."
"내 생각은 좀 달라요. 바디 피어싱을 했다구 해서. 또, 염색을 했다구 해서 무조건 써튼 카테고리에 넣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 좀 무리가 있지 않겠어요? 물론 당신이 말하는 써튼 카테고리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요. 그런 부류가 분명히 있지요. 하지만 머리 염색이나 바디 피어싱은 개인적인 취향에서 선택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좀더 열린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이에게 그건 나쁜 거니까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구요. 이번 기회에 클레어하고 이 문제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어요. 클레어가 엄마 생각을 알고 있고 나도 그 아이 생각을 알고 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직접 해주려구요."

"근데, 클레어가 왜 그걸 하고 싶어해요? 클레어 긴 머리카락이 차분하니 윤기 있고 너무 예쁜데. 부스스한 내 머리를 보면 때때로 당신 머리털이 부러워지는 거 알아요?"
"한국에서도 머리카락에 염색과 하이라이트를 많이 하나봐요. 한국에서 금방 온 아이들까지 그걸 많이 했는데 클레어 눈에 그게 이뻐 보였나봐요."
"정말, 앨리슨도 했던데... 앨리슨 부모님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여기서 대학원 과정 준비하는 분들이랍니다. 아이들 교육에 관심도 많고 좋은 분들이에요."

"그래요?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들이 미국의 하위문화를 좋아하고 따라가는 걸 어떤 때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써던 캘리포니아 대학가에 가보면 한국 학생들이 공부를 참 잘해요. 아주 스마트하지요. 그런 면에서 한국인들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의 옷차림이나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저건 아니다 싶은 게..."

처음엔 펄쩍 뛰던 탤리가 한층 누그러지더니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이내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하기야, 나도 때로 써튼 카테고리에 묶이기도 하죠. 내 차림이 좀 분방하잖아요. 테니스화보다는 슬리퍼를 즐겨 신고 이 나이에 가슴이 많이 드러난 꼭 맞는 옷과 벨 모양의 청바지를 입고 다니니... 일부 학부모들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내 직업적 특성과 또, 내 개성을 인정해 주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상하게 보기도 하거든요."

"그게 여기 남부지역의 특성인 거 같아요. 좀 보수적이잖아요. 여기가."
"맞아요. 자기 눈 앞의 사각 상자(Square Box)밖에는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서 볼 줄 모르는 거예요."
"개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어떤 카테고리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종종 치명적인 편견을 낳을 수도 있는 거 같아요.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낫기 힘든 상처로 남을 수도 있고."
"아! 맞아요. 편견. 편견은 참 무서운 거죠. 오늘 얘기 즐거웠어요. 정말, 스시 만드는 법 언제 가르쳐 줄 거예요?"

이번엔 가연이 담임선생님한테 물었다.
"클레어가 머리카락에 하이라이트를 하고 싶어하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지난해 겨울 갓 결혼한 그녀는 언제 봐도 활동적이고 거침이 없다.
"내 머리를 좀 보세요. 나도 했는 걸요."
"그건 클레어의 선택이에요. 존중해 주세요. 그리고 저는 클레어를 믿는답니다."

"엄마, 오늘 알러지 테스트 해 줘야 돼요."
엊그제 사온 염색약에 알레르기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제 팔에다 테스트해 달란 말이다. 어서 빨리 제 머리에도 레드 오렌지 꽃이 피길 기다리는 아이 맘이 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에 나오는 탤리는 미국 사는 이야기 15번 "탤리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을 보시면 누군지 아시게 될 겁니다. 제 딸 가연이 친구 브룩의 엄마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에 나오는 탤리는 미국 사는 이야기 15번 "탤리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을 보시면 누군지 아시게 될 겁니다. 제 딸 가연이 친구 브룩의 엄마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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