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한 상혼에 길든 사회

볼륨을, 볼륨을 낮춰 주세요

등록 2001.07.09 00:37수정 2001.07.0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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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는귀 먹은 사람이다. 오른쪽이다. 작가 가운데 제주도 이야기 즐겨 쓰는 현기영 선생이 한쪽 귀 잘 안 들려 술집 같은 곳에서 얘기 나누다 보면 한쪽 귀에 손바닥을 대고 소리를 모으시는 것을 종종 보았는데, 이제 보니 나 자신이 가는 귀 먹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은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도 내게는 예사로 들리고 전화 수화기는 꼭 왼쪽에 대어야만 답답함을 면하고 그나마 상대편 말을 들을 수 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꼭 뭐? 또는 응? 하고 되묻는 버릇이 생겨, 성미를 좀 늦춰 상대방이 한 말이 무엇인지 추리라도 해서 알아내려 한 후에야 되묻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니 나는 웬만한 소음에는 둔감한 사람이다. 또 여기에 직업까지 비평가니 소란과 논란과 잡담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와는 또 정반대로 늘 내 자신이 소음에 취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논란이나 논쟁, 그리고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 은근히 남 헐뜯기 좋아하는 이들이 지어내는 뜬소문 같은 것들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글자 그대로 소음, 시끄러운 소리에 관한 말이다. 나는 우리네 삶을 둘러싼 시끄러운 소리들이 견딜 수 없다. 소리는 나를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어지럽게 만들고 마침내는 주저앉히고 쓰러뜨리기까지 한다. 소리라는 것이 견딜 수가 없다.

무슨 판매이론이라고 들었다. 옷가게에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으면 그 음악이 사람들의 구매욕을 자극하여 판매고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 지독한 이론이 언제부터 힘을 발휘하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내 귀에 그 이론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아마도 8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해도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레스토랑이며 호프집이며 옷가게며, 하다 못해 골목을 누비는 트럭 행상 분들까지 저마다 거대한 스피커를 장착하고는 '빠르고 경쾌하고 명랑한' 음악을 틀어놓기 시작한 때도 바로 그 무렵부터였다고 기억된다.

그 시끄러운 음악들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빨리 커피를 마시고 자리를 뜨게 하고, 얼마나 많은 맥주를 마시게 하고 얼마나 값비싼 옷을 제 분수도 모르고 사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신비의 '묘약'으로 인해 정말 나는 쥐 피리에 홀리듯이 사내 둔갑한 여우 따라 무덤에 들어가듯이 먹고 마시고 쓰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정이 정말 그렇다 해도 그런 천박한 판매 이론이 장사하는 분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명동을 정신 못 차릴 음악소리로 어지럽게 만들고, 서울역을 절대자 열심히 판매하는 이들 독무대로 만들고, 대학로를 저마다 뒤질세라 볼륨 높이는 성가대와 '사설' 그룹들의 난무장으로 만들고 정밀한 고요가 지배해야 할 산 속 절을 불경테이프 튼 확성기가 스님 대신하는 세상으로 만드는 일을 더 이상 참아낼 힘이 나에게는 없다.

소리에 찢긴 나의 안스러운 귀! 그러나 어디 나뿐이겠는가.


볼륨을, 볼륨을 낮추었으면 좋겠다. 레스토랑과 호프집에 들어가면 들릴 듯 말 듯한 부드럽고 느린 음악이 은연중에 도시생활에 지친 내 신경을 위무해 주고, 옷가게에 들어가면 점원 분은 내가 옷을 고를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는데 그 사이에 정적 같으면서도 소리가 없지는 않은 음악이 나의 기분을 '업그레이드' 해주고 도심 속 조계사에 가면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고요가 나를 침묵으로 인도하는, 그런 세상에서 나도 나의 말을 크지 않게 높지 않게 위압적이지 않게 내며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의 상식을 따라 살아가고 싶다.

볼륨을, 볼륨을 낮추어 소음과 욕설과 잡음이 부끄러운 우리네 세상 되기를, 나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어서 빨리, 도시의 공사장은 소리의 장막 치고 일을 하고 시장과 백화점과 상가는 분주한 한가로움이 넘치는 곳 되고 대학로에나 가야 그 희귀한 소음이 반갑게도 흘러 넘치는 세상 되어 바쁜 샐러리맨들이 한가로운 산책자처럼 도시를 유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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