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부끄러운 줄 모르는 미 정부"

미 국무차관, 총기 장사꾼들 원고 그대로 읽었나

등록 2001.07.12 11:00수정 2001.07.12 15:08
0
원고료로 응원
"우리의 미국 정부가 이토록 파렴치할 수 있는가."
제가 분개하는 게 아니라, 미국 뉴욕타임스 사설의 이야기입니다.

신문에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9일부터 20일까지 유엔에서 소형 총기 불법거래를 근절하자는 국제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소형 총기(small arms)란 권총을 비롯, 소총과 기관총 및 수류탄 투척기 등을 말한답니다. 한해 50만명이 소형 총기에 목숨을 잃는다는군요.

문제는 소형 총기 불법거래를 근절하자는 유엔의 움직임에 미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찬물을 끼얹고 나선 데 있습니다.

존 볼튼 국무부 차관은 10일 140개국 정부와 비정부기구(NGO) 대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민간인의 소형총기 보유 금지를 검토한다는 유엔 선언문 시안은 미국 헌법에 위배되며 수출 상대를 정부로 제한하자는 제안 역시 압제에 맞서는 비정부단체에 대한 지원을 봉쇄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답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식의 사설을 들고 나왔습니다.

차라리 볼튼 차관 대신 영화 배우 출신인 찰튼 헤스턴 미 총기협회(NRA) 회장을 미국 대표로 파견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비꼬면서 시작된 이 사설은 볼튼 차관의 연설이 국제사회의 불법 총기거래 근절 노력을 내정 간섭으로 여기는 NRA 원고를 충실하게 따른 것이라고 분개하는군요.

뉴욕타임스는 볼튼 차관이 소형 총기 불법거래 제한이 미국인의 권리 침해라고 밝힌 것은 미국 외교를 국내 정치적 영합에 뻔뻔스럽게 종속시킨 행위(shameless subordination of diplomacy to domestic political pandering)라고 맹비난했습니다.


아무리 미국이 1998년 기준 한해 12억달러(약 1조5700억원) 어치의 소형 총기를 파는 세계 최대 무기수출국이지만 국무부 차관이라는 사람의 주장이 총기 장사꾼 모임에서나 나올 법한 수준이라는 지적이죠.

뉴욕타임스는 선진국에서 수출되는 소형 총기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시에라리온, 콩고, 앙골라, 스리랑카, 콜롬비아 등 제3세계 민간인들이며 이번 회의는 미국인들이 아니라 전세계 독재자와 전쟁광들로부터 총기를 제한하려는 노력임에도 불구, 미국이 국제협력의 미약한 추진력마저 가로막은 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유엔의 계획은 미국인의 합법적 총기소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며 법적인 구속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볼튼 차관의 발언은 그 동안 국제사회의 우려에 저항해온 러시아, 중국 같은 무기수출국(사실 이 문제에서 미국과 같은 배를 탄 동지죠)은 물론 충실한 고객 국가인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무기수입국에도 국제사회의 노력을 거부할 수 있는 정치적 빌미를 제공했다는 게 뉴욕타임스의 지적입니다.

전 구구절절 공감하며 이렇게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저렇게 나오는 데야 유엔이 뭔 결론을 내겠습니까.

불법거래된 값싼 소형 총기는 조작도 쉬워 어린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주역입니다. 지난 10년간 소형 총기에 희생된 어린이들만 200만명에 달한다죠.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는 30만명의 어린이가 어린이에 의해 학살됐습니다. 콜롬비아에서는 어린이 3명 중 2명이 가족에 대한 살인 혹은 살인기도를 목격하고 있답니다.

총을 파는 장사꾼, 아니 일개 장사꾼이라기보다 고수익을 내는 기업들에게 이런 문제점들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순진하게 흥분도 해봅니다.

사실 미국도 요즘 국내에서 총기사고가 많이 나니까 문제의식이 높아진 거지, 그 동안에야 총기수출국으로 재미만 볼 뿐 희생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 뉴욕타임스의 흥분에는 과거 총기정책에 상대적으로 엄격했던 빌 클린턴 민주당 정부에 대한 지지와 보수적 부시의 공화당 정부에 대한 반발이 작용한 측면도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이번 문제와 관련, 미국 정부의 입장에 대해 'shameless'라고 지적하는 언론도 뉴욕타임스 정도지만 말입니다.

아무래도 전 국제사회의 냉정한 논리, 치열한 이해관계에 어린이들이 희생된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또 밀거래되는 총기가 점점 더 늘어난다는 데, 수요가 있으니 공급할 뿐이라는 논리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다음 세대가 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힘내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가 메일진으로 발행하는 내용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제가 메일진으로 발행하는 내용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5. 5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