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에 개뛰듯하는 무리들을 보며

등록 2001.07.17 17:38수정 2001.07.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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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천둥에 개뛰듯한다'는 속담을 자주 떠올린다. 아마도 장마철인 데다가 천둥 번개가 잦은 한여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천둥에 개뛰듯하는 현상을 너무 많이 보며 사는 탓이기도 할 터이다.

천둥에 개뛰듯한다는 것은 사람의 경망한 행동거지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사회의 어떤 중심 없는 집단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할 터이다.

나는 그 속담의 재미로운 뜻과 함께 그런 속담이 생겨나게 된 사정이며 배경 따위도 생각을 해 보곤 한다.

생각하면 참 씁쓸하고 비애스럽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그런 속담이 다 생겨났을까? 걸핏하면 흥분부터 하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도 가로뛰고 세로뛰며 오도방정을 다 떠는 사람, 제법 언턱거리가 될 듯싶은 일이면 침소봉대해서 큰소리치고 내닫기부터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다 천둥에 개뛰듯하는 부류일 터이고, 그들의 가벼운 처신으로 말미암아 천둥에 개뛰듯하는 사회 현상마저 생겨난다.

그런데 그 속담의 생명력은 참 질기기도 하다. 여기에서의 '생명력'이라는 말은 좋은 뜻이기도 하고 나쁜 뜻이기도 하다.

모르면 몰라도 그 속담이 생겨난 때는 아주 옛날, 수백 년은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야 물론 천둥에 놀라 뛰는 개를 본 데서 생겨나고, 그런 평범한 일종의 자연 현상을 일컫는 뜻으로 그 말이 쓰여졌겠지만, 그 말은 차츰 사람의 경망한 속성이나 행동거지를 지칭하면서 무슨 일에 이리저리 휩쓸리기 잘하는 사회 현상까지 포괄하는 속담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고로 속담이란 어떤 현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경고'적인 뜻도 담고 있다. '교훈'의 자락을 깔면서 '극복'의 의지까지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천둥에 개뛰듯 한다'는 말도 그런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속담이다. '천둥에 개뛰듯 한다'는 말은 곧 '천둥에 개뛰듯하지 말자'는 뜻까지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극복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 '가치' 쪽으로 본다면야 그 속담의 생명력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 사회공동체에 발전 지향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좋은 속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모습은 도무지 그렇지가 못하다. 진중치 못하고 걸핏하면 천둥에 개뛰듯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고, 그런 사회 현상도 곧잘 일어난다. 그래서 천둥에 개뛰듯한다는 속담은 여전히 부정적인 질긴 생명력으로 우리네 삶의 주변에 존재한다.

더 큰 문제는 소위 정치를 한다는 덩치 큰 사람들 중에 천둥에 개뛰듯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정치판에 그런 경망한 현상이 자심하다는 사실이다.

요즘 우리 시대 최대의 명제이자 당위인 '언론 개혁' 문제는 정부의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 단행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천둥'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천둥이다. 천둥은 대개의 경우 큰비를 예고하는 것이고, 큰비를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폭우로 큰 수해를 입으신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절대로 우리네 생활 피해를 표현하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여기에서의 비는 '변화'를 상징한다. 만물을 새롭게 생장시키는 것이기도 하고, 온갖 더러운 것들을 쓸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좋은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라면, 천둥은 크면 클수록 좋다. 아주 크고도 확실해야 한다.

그런데 시민들의 줄기찬 언론개혁 운동으로부터 촉발된 정부의 언론사에 대한 세무 조사가 확실히 천둥은 천둥인 모양이다. 그 천둥에 놀라 천둥에 개뛰듯하는 무리며 집단 현상들이 연일 곳곳에서 벌어진다. 보면 볼수록 진풍경이다. 생각해 보라. 천둥에 개뛰듯하는 그 처신, 그 모습들을! 얼마나 재미롭기도 한 풍경인가!


그런데 천둥에 개뛰듯하는 현상들에서 파생하는 가장 큰 문제 하나가 '거짓말'들의 양산이다. 지금 '조·중·동'이라는 이름의 동네와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천둥에 개뛰듯하는 현상 속에서 무수한 거짓말들이 양산되고 있다. 가히 거짓말들의 홍수 시대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대단히 국부적이다. 내가 그런 현상의 노출을 설명함에 있어 범위를 넓게 잡지 않고 굳이 '조·중·동'이라는 이름의 동네와 한나라당 주변으로 한정하는 까닭은 뒤에 가서 설명을 하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일러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가 어제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을 올렸더니, 어떤 한 사람은 김 주필이 거짓말쟁이를 비판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요지의 '의견'을 내 글에 달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적' 거짓말들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소설가 출신 국회의원 김홍신씨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주둥이를 공업용 미싱으로 꿰매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폭언을 해서, "어이구, 저 사람이 과연 소설가인가!"하고 내가 지역신문에다가 장탄식을 쓴 적도 있지만, 나는 절대로 김 대통령의 입을 공업용 미싱으로 꿰매야 할 정도로 그가 거짓말을 많이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을 거짓말쟁이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막상 그 거짓말의 세목을 대라고 하면 거개가 고작 든다는 것이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했다'는 것 정도다. 나머지 거짓말들에 대해서는 세목을 대지도 못하면서 그저 '많다'고만 한다.

그렇게 김대중 대통령의 과거 '정계 은퇴 선언 번복'을 크게 문제 삼고 그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 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시절 여러 차례나 '민정 이양' 약속을 번복한 사실이라든가, 두 번째 대통령을 하려고 나섰을 때 "이번이 마지막이다. 절대로 삼선 개헌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서는 삼선 개헌을 단행한 사실, 삼선을 위한 대선 때도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고서도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을 단행한 것 등등, 그 엄청난 거짓말들은 제대로 기억하지를 못한다. 그저 피해자의 거짓말만 물고 늘어질 뿐이지 가해자의 거짓말은 거짓말로 인정도 하지 않는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그 거짓말의 크기와 용량 따위를 비교도 해 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대비를 하나 들어보겠다. 1969년과 71년의 김대중 씨의 거짓말(결국은 거짓말이 아닌 사실)과 그때부터 김대중 씨를 거짓말쟁이로 불렀던 사람들이 오늘날 예사로 멋대로 저지르고 있는 거짓말들을 연결시켜 대비해 보는 것은 제법 흥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1969년 삼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때 김대중 씨는 우리 국민이 삼선 개헌을 허용해 주면 박정희 씨는 반드시 영구 집권의 길로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민주공화당 사람들은 김대중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씨는 만약 이번에도 박정희 씨를 당선시켜 주면 앞으로 다시는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을 유세장마다 하고 다녔다. 그때도 민주공화당 사람들은 김대중 씨를 일러 천하에 없는 거짓말쟁이라고 선전했다. 내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김대중 씨는 그때부터 거짓말쟁이라는 닉네임 아닌 닉네임을 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대중 씨의 그런 말은 1년 후 정확히 들어맞고 말았다. 72년 10월 유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국민들은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대통령 직접 선거라는 민주화의 그 과실은 그로부터 15년이라는 암울하고도 험난했던 세월을 거치고서야 겨우 되찾게 된다.

72년 5월 군에서 제대한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김대중 씨의 그 예언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사실에서 암울한 경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민주공화당 사람들이 길길이 날뛰며 거짓말이라고 공격했던 김대중 씨의 그 말은 1년 후 사실이 되어버렸고, 그러므로 결국은 그 말을 거짓말이라고 했던 사람들의 말이 거짓말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옛날에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마구 했던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살아남아서, 지금도 계속 이상한 거짓말을 멋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좀더 재미있는 것은 김대중 씨의 옛날의 그 예언적이고 경고적인 말을 본뜬 것인지 오늘날의 거짓말쟁이들은 색깔론을 입힌 거짓말을 제법 예언적이고 경고적인 수법으로 해댄다는 점이다. 그리고 옛날의 김대중 씨의 그 예언과 경고는 후에 정확히 사실로 들어맞은데 반해 오늘의 거짓말쟁이들의 거짓말은 오로지 색깔론이 목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경고와 예언의 수법을 차용한다 해도, 한결같이 그저 그냥 '아니면 말고' 식으로 해대는 무책임의 적나라한 반영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 무엇으로 재고 따져보더라도, 한 뼘도 들어맞을 턱이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쯤에서 <오마이뉴스>의 최근 기사들을 한번 살펴보자.

부천 원미갑( 위원장 김정기) 지구당 행사에 초청 연사로 나선 김문수 의원은 "조선일보가 나쁜 신문이면 만원 내고 그 신문을 보는 대다수의 국민들 또한 나쁜 사람들이 되는 것이 아니냐"면서 "어떤 장관이든 사람이든 간에 신문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런 나쁜 신문을 돈 내고 보는 사람은 그렇다면 또라이냐"고 목소리 높이기도 했다. (김문수 의원의 이 발언은 내가 볼 때 완전히 또라이성 발언이다. 이 발언의 무지와 맹점을 포함하여 김문수를 나중에 한번 집중적으로 다루어볼 생각이다. 그 친구 또한 내게는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또 대전 서갑 지구당의 이재환 위원장은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규탄대회를 열고 "현재 진행 중인 언론 탄압은 대북 정책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며 "김정일이 답방해 김 대통령과 통일하겠다고 선언하면 대선도 필요 없게 되고, 이같은 상황에서 통일대통령이 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규탄대회를 연 부산 사하갑 지구당의 엄호성 의원도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과 관련 "김정일이 오기 전인 현재 통일 헌법이 논의되고 있다"면서 "통일 헌법이 효력을 발휘하면 내년 대선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저 1969년과 1971년의 김대중 씨의 예언과 경고를 연상시키는 발언들이다. 그들 발언 내용의 수준이야 중학생 수준도 못되는 것이지만, 예언성 경고성 분위기를 억지로 차용하려고 드는 수법이 일견 재미롭게도 느껴지는 탓이다. 나중에 정확하게 들어맞은 김대중씨의 그 예언을 거짓말이라고 악을 쓰며 매도했던 무리들의 거짓말이 오늘에도 색깔론을 물고 늘어지며 마구 자행되는 현실이 서글프면서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언론 개혁 ―언론사 세무조사'라는 천둥에 놀란 나머지, 완전히 천둥에 개뛰듯하는 현상에서 파생하는 작태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재미롭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과거에는 지금과 같은 식의 색깔론이 바람을 타면 금방 사회적인 냄비 현상 ―천둥에 개뛰듯 하는 현상이 생겨나곤 했다.

몇 년 전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사찰 압력이 커지고 그에 따라 북한의 저항이 나타나면서 한반도에 이상한 긴장감이 고조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중산층 일각에서는 생필품 '사재기'현상까지 생겨났었다. 무게 없는 우리나라 중산층의 오도방정이라니! 그때의 그 약간의 긴장감이 결코 천둥일 까닭이 없는데도, 천둥에 개뛰듯하는 우리나라 중산층의 경망한 처신에 나는 비통한 심정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도 이상하다. 한나라당 사람들이 하는 소리들로 보아서는 분명코 통일을 빙자하는 무슨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데, 왜 우리 사회에 그전처럼 생필품 사재기 현상도 생겨나지 않고 조용하기만 한 것일까? 한나라당 사람들이 하는 얘기들로 보아서는 정녕코 우리 사회에 천둥에 개뛰듯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져야 하는데, 왜 그렇지가 않은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다. 우리 국민들은 이제 대체로 성숙할 만큼 성숙했다. 그까짓 요설들에 귀가 솔깃하고 마음이 흔들려서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천둥에 개뛰듯하는 사람들, 그런 현상은 완전히 한정되어 있다. 옛날부터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국민들을 속이며 국민들로 하여금 걸핏하면 천둥에 개뛰듯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그런 족속들이나 계속 천둥에 개뛰듯하며 살면 된다.

우리 국민들은 그저 느긋이 앉아서 그들의 천둥에 개뛰듯하는 풍경을 구경이나 하면 된다. 천둥에 놀란 그들이 제아무리 개뛰듯 요란을 떨고 발광을 해도, 이미 천둥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언론 개혁'이라는 대명제 ―도도한 역사의 물살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언짢은 일이 생겼다.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 회장 부인의 별세 소식이다. 거의 '자살'로 결론이 난 모양인데, 천둥에 개뛰듯하는 무리들은 그런 일까지도 정부의 언론 탄압의 결과로, 다시 말해 정부와 싸울 수 있는 '이용거리'로 삼으려는 모양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런 천박한 행위 또한 천둥에 개뛰듯하는 일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점잖은 내 체면에 그것을 대놓고 말할 수도 없고, 하여간 참으로 난감하다.

제발 부탁하노니 고인의 죽음을 놓고 그 가련한 주검 옆에서까지도 천둥에 개뛰듯하는 경거망동일랑 부디 삼가주기 바란다. 그런 사건의 포괄적 근원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더욱 중요하고도 온당한 일임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나의 이런 얘기가 그들에게는 여전히 '쇠귀에 경읽기'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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