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를 사이에 둔 갑오년 상처들

책들고 떠나는 중국여행(17) - 웨이하이

등록 2001.07.18 15:15수정 2001.07.2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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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웨이하이를 본 것은 바다에서였다. 하나의 섬을 앞에 두고 만들어진 이 항구는 산둥반도의 마지막에 있는 포근한 바닷마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옌타이의 전경을 봤을 때도, 느낌은 비슷했다. 산둥반도 끝자락의 이 항구들은 랴오둥반도와 배편으로도 10시간이면 닿고, 인천이나 북한의 관문인 남포항과도 열몇시간 만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

산둥반도 끝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 긴 해안선 내내 끝나지 않은 백사장과 너무나 청명한 청색 하늘이 이어지는 곳. 그래서 우리나라의 동해안을 생각나게 하는 곳.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빼어난 입지는 근대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리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첫번째 표적이 됐다.


서구 열강은 이미 내외적으로 동력을 잃은 청조를 위협해 땅 따먹기에 치중했다. 특히 천혜의 항구이자 한반도로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웨이하이, 칭다오, 옌타이, 따리엔 등은 그 첫번째 목표였다.

▲웨이하이의 인어상. 항구옆에 있는 인어상 뒤로 보이는 섬이 북양함대가 주둔하던 리우공다오다. ⓒ 조창완
웨이하이의 항구에 처음 내려서 찾아간 부두터미널에서 기자는 너무나 낯익은 단어를 접해야 했다. 다름 아닌 ‘갑오전쟁’이라는 단어였다. 웨이하이의 항에서 봤을 때, 득달같이 나의 머리는 ‘갑오농민전쟁’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갑오농민전쟁의 텍스트인 박태원의 소설 ‘갑오농민전쟁’으로 기억이 회귀됐다.

1894년 제국주의 세력은 중국 동부해안이나 조선에 직접적인 위협을 시작했고, 두 나라는 같은 해에 개혁과 더불어 안팎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조선과 청나라의 갑오년

중국에서 ‘갑오전쟁’(甲午戰爭 1894~1895)으로 불리는 전쟁은 우리에게 흔히 ‘청일전쟁’으로 불리는 근대사의 한 사건이다. 청일전쟁은 이미 제국주의화되어 조선부터 식민지를 확대를 꾀하려는 일본과 기득권을 가진 청나라가 벌인 우리에게는 치욕스런 전쟁이었다.


당시 백성들은 청의 식민지적 지배와 일본 상업자본의 진출, 조선왕조의 압제 등에 시달렸다. 여전히 산업혁명의 폭발력을 감지못한 청나라로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욕이 달가웠을 리 없다. 더욱이 조선이 발판이 될 경우 청나라 자신도 위험하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 분노한 농민들과 동학 교도들이 1894년 봉기(蜂起)하여, 5월에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이름하여 ‘갑오농민전쟁’으로 불리는 ‘동학혁명’이다. 그리고 박태원의 소설은 민초들의 관점에서 다룬 동학혁명의 가장 생생한 텍스트다.

월북이나 납북작가들의 작품이 금기이던 시절에 읽혀질 수 없었던 박태원은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게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작가 가운데 하나다. 이 땅이 완전히 일제 식민지로 막 들어가는 1909년 서울에 태어난 그는 1930년 동경법정대에서 공부하다가 중퇴하고 귀국한 후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과 교류하고, 1936년에는 <조광>에 장편 '천변풍경'을 연재했다. 이후 그는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됐고, 6.25전쟁 중 월북해 평양문학대학 교수 등으로 재직하다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해 작품 활동이 금지됐다. 그의 역작인 ‘갑오농민전쟁’은 긴 암흑을 밝히는 작가 스스로의 개명작이었다.

1960년 복권후 그는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집필했고, 사망(86년) 때까지 완전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3부를 완간했다.

이미 ‘태백산맥’이나 ‘토지’, ‘임꺽정’ 등 대하소설에 익었던 눈이었지만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은 문장 속에 강렬한 느낌이 살아있다. 그가 마지막까지 매달렸던 '갑오농민전쟁'은 1부 '굶주리는 봄'(1977), 2부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1980), 3부 '새야새야 파랑새야'(1986)로 구성되었다. 한국에서는 박태원이 사망하고, 시간의 여유를 둔 후 8권 3부(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 칼노래, 타오르는 불꽃)로 출간됐다.

소설은 실제인물 전봉준과 가상인물 오수동 오상민 부자의 영웅담을 적절히 배치하면서도 민중적 영웅인 허구적 인물의 투쟁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답게 선동적인 그의 글맛은 당시 민초들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곳곳에 산재한 제국주의 시대의 흔적

▲웨이하이항의 이른 아침 풍경 ⓒ 조창완
동학은 그 자체로 청나라에게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지만 변화하는 역사는 청나라에게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미 항로를 잃은 조선왕조는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까지 이 땅에 확실히 끌어들였다. 서울에 주병(駐兵)한 일본은 조선 내정의 청일 공동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거부되자 일본의 단독개혁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진행 중이던 영국과의 조약 개정을 성공시킨 일본은, 조선이 청에 대한 복속관계의 파기와 청국군의 철병을 거절하자 조선 정부를 무력으로 억압하고,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과 29일 성환(成歡) 육전에서 청국군을 격파하였다.

8월 1일의 개전 후 9월에는 평양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우세를 확보한 일본은 랴오둥(遼東)반도의 탈취 계략을 세우고, 10월에 청국 영토에 진격하여 뤼순(旅順)학살사건을 일으킨 후 봉천(奉天) 남부를 제압, 이어서 웨이하이웨(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타이완을 점령했다.

웨이하이는 청나라 주력해군인 북양함대의 주력이 있던 곳으로 이 전투에 패배함으로써 절대적인 열세에 빠진다. 중국에서 갑오전쟁이란 역사에서 부끄러운 기억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웨이하이는 그 상처를 잘 간직하고 있다. 웨이하이에서 유람선을 타고, 20분이면 리우공따오(劉公島)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은 북양함대의 본거지가 있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외국 여행자들에게 특별히 감흥을 줄 만한 것은 없다. 초라한 포대들이나 허물어져가는 진지들, 볼거리 없는 수족관이 있을 뿐이다. 중국인들에게 이런 역사의 색채보다 여행피서지로 중국 내에서 유명하다.

진시황이 동쪽에 가서 약을 구했다는 전설로 유명한 롱청산토우(榮成山頭), 만마리의 백조가 장관을 이루는 톈어후(天鵝湖, 백조의 호수) 등이 있지만 웨이하이가 가장 많이 붐비는 계절은 시원한 해수욕을 할 수 있는 여름이다.

웨이하이에서 옌타이에 이르는 길은 우리나라 동해안의 바닷가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백사장의 연속이다. 마음 같아서는 중간중간에 있는 마을에서 내려 민박을 하고 쉬고 싶을 정도다.

갈갈이 찢긴 산둥반도

청나라가 갑오전쟁에서 일본에게 당한 패배는 이미 제국주의들의 사정권에 들어온 중국을 더욱 비참하게 하는 전환점이었다. 전쟁 후 청은 18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해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펑후섬의 할양, 배상금 2억냥 지불 등을 약속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옌타이산 공원에서 파는 꽃빵 가게의 정겨운 모습 ⓒ 조창완
하지만 일본의 중국에 대한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제국주의국가들의 밀고 밀리는 탐욕이 본격 시작된다. 전후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3국 간섭의 보상으로 독일이 교주만(膠州灣 현재의 칭다오 부근)을, 러시아가 뤼순, 따리엔을 조차한 데 자극받아, 영국은 1898년 영국은 북양함대의 기지인 리우공따오를 포함한 전 항만을 25년간의 기한으로 조차하여 영국 동양함대의 기지로 삼았다.

그런 흔적이 가장 확실히 살아 있는 곳 중에 하나는 옌타이다. 옌타이는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으로 개항되었다가, 1876년 영국과의 즈푸조약에 의하여 반환되었다. 반환 이후 옌타이에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속속 영사관을 세웠다. 옌타이시를 조망할 수 있는 옌타이산은 당시에 각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사관을 설립했고, 최근에 그 유산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과거 영사관 건물들을 복구해 관광지로 삼으려는 의도다.

열강은 이 산둥반도를 기점으로 끝없이 조선에 대한 욕구를 불태웠다. 이미 몰락하는 왕조를 세우려던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쟁투 속에서 지친 민초들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이 동학을 이끌었다. 박태원의 소설이 가장 초점을 맞춘 것은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민초들의 심리변화와 또 그 과정에서 분출되는 극악한 폭력성들이 생생하다.

기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그로테스크에 가까운 세계는 저자 자신의 실명상황과 암담한 심리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작가 황석영이 ‘장길산’을 쓸 때, 장산곶매를 그토록 가보고 싶어하고, 박완서가 ‘미망’을 쓸 때 개성을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듯 박태원도 전라도의 황토빛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볼 수는 없더라도 그의 손으로 붉은 흙을 만지고 싶었을 테지만 박태원은 자료와 기억만으로 글을 썼다.

돌아오는 길에 꼭 다시 들리고 싶은 바닷가의 모래빛과 하늘빛의 조화가 선명하다. 때로는 그곳에 여행객들이 아닌 전장이 됐다고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그리고 그 맑은 풍경과 더불어 거대한 욕심과 잔악함을 준 누군가가 좀 미워지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책소개 -박태원 소설 ‘갑오농민전쟁’
박태원(호 구보(丘甫 또는 仇甫))은 1909년 서울에서 출생해 경성사범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29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를 중퇴하고, 30년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33년 이후 이태준(李泰俊)■이효석(李孝石) 등의 예술파적 작가들과 함께 구인회(九人會)의 주요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작품의 형식과 문장의 기교 등에 의식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광고■전단 등의 대담한 삽입, 쉼표 사용에 의한 장문의 시도, 중간제목의 강조, 한자의 남용 등 독특한 문체를 낳았다. 그의 작품 경향은 프로문학 쪽과 같은 이데올로기 성향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이효석과 같은 예술지상주의에 기울지 않은 채 일제강점기 아래 작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서울 서민층의 변모 양상을 객관적인 서술로 묘사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딱한 사람들(1934)》 《전말(1935)》 《비량(1936)》 등의 단편과,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1934)》, 장편 《천변풍경(1936)》 《갑오농민전쟁(1986)》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갑오농민전쟁은 한국에서도 8권으로 출간됐다.

덧붙이는 글 책소개 -박태원 소설 ‘갑오농민전쟁’
박태원(호 구보(丘甫 또는 仇甫))은 1909년 서울에서 출생해 경성사범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29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를 중퇴하고, 30년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33년 이후 이태준(李泰俊)■이효석(李孝石) 등의 예술파적 작가들과 함께 구인회(九人會)의 주요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작품의 형식과 문장의 기교 등에 의식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광고■전단 등의 대담한 삽입, 쉼표 사용에 의한 장문의 시도, 중간제목의 강조, 한자의 남용 등 독특한 문체를 낳았다. 그의 작품 경향은 프로문학 쪽과 같은 이데올로기 성향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이효석과 같은 예술지상주의에 기울지 않은 채 일제강점기 아래 작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서울 서민층의 변모 양상을 객관적인 서술로 묘사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딱한 사람들(1934)》 《전말(1935)》 《비량(1936)》 등의 단편과,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1934)》, 장편 《천변풍경(1936)》 《갑오농민전쟁(1986)》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갑오농민전쟁은 한국에서도 8권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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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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