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천년을 썩지 않는 한지로

등록 2001.07.24 20:00수정 2001.07.26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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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0월 14일 경주 불국사석가탑 해체 공사를 하자 금동제 사리함이 안치되어 있었고, 그 둘레에는 목재소탑, 동경, 비단, 향목, 구슬 등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닥종이로 된 두루마리 즉 다라니경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경의 폭은 6.7cm, 길이는 6m가 넘었다.

다라니경이란 탑을 만든 다음 불경을 외움으로써 성불한다는 뜻으로 만들어 탑 속에 넣어두는 경전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1200년 동안 좀벌레에 그 두루마리 일부가 침식되어 있던 것을 복원, 국보 12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종전까지 알려진 세계 최고의 인쇄물은 서기 770년에 새긴 것으로 다라니경보다 적어도 20년 이상 뒤의 것인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고, 간행연수가 기록된 세계 최고의 인쇄물은 중국 돈황 석실에서 발견하여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간 중국의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 서기 868년에 목판을 만든 것으로 다라니경보다 최소한 118년 뒤의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닥종이이다. 즉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 때 이미 닥을 종이의 원료로 해서 현대의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운 종이를 제조했다. 1200년을 탑 속에서 보내고도 형체를 보존하고 있는 닥종이로 만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우리 제지 기술의 우수성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점포는 벽과 천장을 온통 한지로 도배해놨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감을 주고, 느낌이 좋다며 칭찬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칭찬하는 그들도 정작 한지를 쓰지는 않는다. 그저 남이 쓰는 것을 보니 좋은 것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지는 좋은 종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 실제 써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한지가 좋은 종이인지 정확히 모를 뿐더러 한지상품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값이 비싸다는 선입견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한지를 뉴욕과 도쿄에서 팔면 서울에서보다 더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한다.

자, 이제부터 한지의 모든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선비의 나라였다. 그런데 그 선비는 문방사우(文房四友)가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선비는 학문, 시화와 더불어 살았는데 이 학문과 시화에 있어서 문방사우 즉 종이, 붓, 벼루, 먹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도구였다.

여기에서 종이는 일반적으로 한지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종이인 '한지(韓紙)'는 예로부터 주변국가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닥'을 주원료로 하여 만들었기에 '닥종이'라고도 불려 왔으며, 손으로 뜨는 수초지(手抄紙)이다.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 중기까지 우리나라는 종이제조법이 발달되어 활발하게 쓰여졌고, 중국의 걸러뜨는 방식과 달리 한지는 외발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뜨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희고 광택이 있으며 질긴 종이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후 중국과 일본의 기계지가 대량 수입되면서 우리나라의 수초지는 거의 쓰지 않게 되고 창호지(문종이)와 장판(방바닥에 바르는 종이) 등으로 겨우 명맥을 이었다. 또 서양식 종이공장이 설립되면서 재래종이는 완전히 사양길에 들어섰으며, 기계와 화공약품이 천연원료와 수제공정을 대체하고, 대량생산과 비용절감에 중점을 두어 한지도 본래의 특성을 잃게 되었다.

한지의 원료

한지의 주원료로는 닥나무(저:楮, Broussnetia Kazinok Sieb)의 인피섬유가 사용되어왔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며, 꾸지나무라는 것도 있다. 닥나무는 토종이고, 머구쟁이, 부닥, 개닥 등으로도 불리는 꾸지나무(구:構, Broussnetia Papyrifera Vent)는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닥나무와 꾸지나무는 오래 전부터 구분없이 심어왔기 때문에 이젠 식별이 어렵다.

한지의 주원료는 닥나무와 꾸지나무 이외에도 산닥나무(안피:雁皮)와 삼지닥나무 등이 이용되고 부원료로는 닥풀(일명 황촉규:黃蜀葵)이 쓰인다. 이것은 종이를 뜰 때 쉽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요즘은 PAM 또는 PEO같은 화학점제를 사용한다.

한지의 특성

한지는 닥나무, 뽕나무 등 천연 재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자연이 주는 질감이 살아있고, 전통적인 한지 제작 방법으로 인해 곱고 질긴 느낌을 준다. 한지는 차가운 맑은 물로 만드는데 차가운 물은 섬유질을 탄탄하게 해 종이에 빳빳한 감촉과 힘을 주어 박테리아 등의 미생물이 번식하는 것을 막아주고, 닥풀은 매끄럽고 광택을 더해준다.

종이에 구멍을 낸 다음 잡아당겼을 때 어느 정도의 힘까지 버티는가를 측정하는 것을 '인열강도'라 한다. 높은 수치를 보일수록 질긴 종이가 되는데 한지는 900 이상의 수치를 나타낸 반면 섬유폭이 좁은 삼지닥나무를 사용해서 만든 화지와 잡목과 볏집을 함께 섞어만든 중국의 선지는 100 정도에서 쉽게 찢어지는 실험 결과를 보인다.

종이를 위아래로 잡아당겼을 때 버티는 정도를 '인장강도'라 한다. 잡아 당기는 힘의 수치가 높을수록 그리고 길게 늘어지면서 찢어질 수록 강한 종이가 된다. 한지는 최고 62N에서 찢어지기 시작한 뒤 5mm 가 더 늘어지고 나서야 완전히 찢어졌다. 일본의 화지는 한지와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화지는 작은 힘에도 쉽게 균열이 생겼고, 거의 늘어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

서화용(붓글씨와 그림용) 종이는 대체로 먹색이 윤택하고 먹물이 고루 먹히면서도 많이 번지지 않아야 좋다. 화지는 기다랗게 먹이 번진다. 선지에 떨어뜨린 먹은 가장자리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빠르게 퍼진다. 이것들은 섬유 속에 먹물이 잘 스며들지만 종이가 질기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한지는 종이를 떠서 말린 뒤 다듬이질을 하기 때문에 번지지 않는다.

양지는 PH 4.0 이하의 산성지로서 수명이 대개 50년에서 길어야 100년 정도가 되면 누렇게 변색되는 황화 현상을 일으키면서 삭아 버리는데 비해 한지는 PH 7.0 이상의 알칼리성 종이로서 세월이 가면 갈수록 오히려 결이 고와지고, 수명이 천년 이상이 된다고 한다.

또 섬유를 비교하면 양지는 짧고 흐물흐물한 목재 펄프로 된 섬유라 종이가 쉽게 약해진다. 하지만 한지의 경우는 기다랗고 형태가 뚜렷한 섬유라서 종이가 질기고 오래 간다. 또 한지는 섬유 사이에 적당한 공간을 가지고 있어서 공기를 소통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고, 햇빛을 투과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지의 통기성과 햇빛 투과성은 문에 바르는 종이(창호지)로 아주 적절하다.

부재료 중 잿물은 적당한 알칼리도를 가지고 있어 인피섬유를 손상시키지 않으므로 종이가 질기도록 작용한다. 또 닥풀은 물에 잘 녹는 물질로 다당류를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중성을 유지하고 있어 한지가 천년의 수명을 가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통적 제조방방법인 '외발뜨기'가 '쌍발뜨기'보다 한지를 강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지는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같은 품질과 크기의 제품을 만들 수가 없다. 이러한 한지의 다양성은 그만큼 미술 재료로서의 다양성으로 이어진다. 또 한지는 부드럽고도 질긴 성질 때문에 구기고, 비틀어서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으며, 회화에서부터 종이 공예, 서예, 조소의 영역에 활용될 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와 혼합하여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변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한지에는 동양적인 고전미가 있다고 한다. 한지에서 느껴지는 은은함이나 온화함, 소박함과 자연스러움 등은 결코 양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느낌으로서 한지의 고유한 특성이다.

한지의 종류

한지는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색깔이나 크기, 생산지에 따라 다르게 부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구분은 재료, 만드는 방법, 쓰임새 그리고 크기에 따라 나누어졌으며, 이에 따른 우리 종이의 종류는 대략 200여 종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은 한지 산업의 사양화로 말미암아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고 창호지, 화선지(동양화를 그리는데 쓰는 종이), 초배지(도배를 하기 전에 잘 붙도록 먼저 붙이는 종이)정도가 겨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만드는 방법에 의한 한지의 종류로 대표적인 것은 '전통외발지, 장지, 화선지, 태지, 피지, 전통염색지, 운용지, 장판지' 등이 있다.

'전통외발지'는 전통적인 초지 방법인 흘림뜨기방식으로 떠서 붙인 종이(합지)로 질기고 강한 특성을 갖고 있다. '화선지(畵宣紙)'는 '군용지'라고도 하는데 닥에 볏짚, 펄프 등을 첨가하여 만든 종이로 먹물을 잘 받으며, 번짐이 좋아 서화용으로 사용되는 종이이다. '태지(苔紙)'는 이끼(태:苔)를 넣어 만든 한지로 편지지나 표구제, 고급 포장지 등으로 사용한다.

'피지(皮紙)'는 닥껍질이나 표백하지 않은 섬유를 넣어 만든 종이로 독특한 질감을 갖고 있다. 주로 초배지로 사용한다. '전통염색지'는 오방색(다섯 방위에 해당하는 색으로 붉은색, 검정, 파랑, 흰색, 노랑을 말함)을 전통 자연 염료(황벽, 홍화, 쪽, 지초, 소목 등)를 사용하여 염색한 색종이이다. '운용지(雲龍紙)'는 일명 "쌍게지"라고도 하며, 기계 한지로 종이 표면에 실 모양의 닥 섬유를 배열하여 만든 색지이다. 주로 포장지로 사용되었다.

'농선지(籠扇紙)'는 닥과 펄프(pulp)를 원료로 만들어 다듬이질한 것으로 '창호지(窓戶紙)'라고도 불리며, 두껍고 강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쓰임은 문종이, 부채 재료 등으로 많이 사용된다. '장판지(壯版紙)'는 닥종이를 여러 겹 붙여서 두껍게 하고 들기름을 먹여 건조시킨 것으로 두껍고 질기며 윤기가 있고 방수성이 좋아 주로 온돌 장판 용지로 사용된다.

한지 만들기

한지를 만든다는 것은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한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한지를 백지(百紙)라고도 하였는데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것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한지 제조 과정은 크게 여덟 단계로 나누어진다. <주원료 만들기-삶기-씻기 및 햇볕 쐬기-두드리기-종이 뜨기-물 빼기-말리기-다듬기>의 과정이 그것이다.

한지의 활용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지를 활용해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 쓰곤 했다. 지승공예, 색지공예, 지장공예, 후자공예, 지호공예 등이 그것이다.

지승공예(紙繩工藝:종이 노끈으로 하는 공예)는 종이를 꼬고 그것을 엮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무늬는 엮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데 색종이나 검은 물을 들인 종이를 함께 넣어 엮기도 하였다. 또한 무늬뿐만 아니라 외형에도 다양한 변화를 주어 갖가지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 마무리를 할 때에는 기름을 먹이거나 칠 또는 채색을 하기도 하였다.

색지공예(色紙工藝)는 한지를 여러 겹 덧발라 만든 틀에 다양한 색지로 옷을 입힌 다음 여러 가지 무늬를 오려 붙여 만든다. 사용된 색지는 한지를 전통염료로 염색한 것이며, 주로 파랑, 빨강, 흰색, 검정, 노랑의 오방색이 기본이 되었다. 고유한 뜻을 가진 갖가지 무늬는 장식미를 더해준다.

지장공예(紙欌工藝)는 나무로 골격을 짜거나 대나무, 고리 등으로 뼈대를 만들어 안팎으로 종이를 여러 겹 발라 만든다. 종이만 발라 마감하기도 하고, 그 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마무리하기도 하였다. 보석함, 문갑, 장롱 등을 만든다.

후지공예(厚紙工藝)는 종이를 여러 겹 붙여 두껍게 만드는 기법을 후지기법이라 한다. 두껍게 만든 종이를 여러번 접어 갖가지 형태의 기물을 만드는데, 표면에는 요철로 무늬를 넣기도 했다. 칠을 하여 튼튼하게 만든 공예품은 가죽과 같은 질감이 난다.

지호공예

종이를 잘게 찢어 물에 불린 뒤 물과 섞어 일정한 틀에 부어 넣거나 덧붙여 이겨 만드는 기법을 지호기법이라 한다. 이렇게 만든 기물은 말린 후에 종이를 덧바르고 기름을 먹이거나 칠을 하여 완성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생활용품을 만들어 써왔다. 종이 우산, 옷본, 종이 항아리, 부채, 갓통, 종이꽃(조화), 종이돈(지폐), 부적 등도 종이를 응용한 또 다른 생활용품이다.

요즘은 한지에 대나무 잎, 꽃잎, 단풍잎 등을 넣어 특허를 받은 한지가 포장지, 벽지, 명함지, 썬팅지, 조명지, 편지지, 편지봉투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미국, 일본에 수출하고 있는데 내수용보다 비싸게 팔린다. 외국에서 오히려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지 즉 닥종이는 우리 조상의 위대한 발명이다. 외국인도 인정하는 이 한지를 외면하지 말고 새롭게 응용하여 자랑스러운 문화를 다시 꽃피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사이트
한지 : www.hanji.com
책임-이승철, 프로그래밍-임채욱, 자료연구-주용범,박혜신, Animation-노길상  
닥나무 코리아 : www.daknamu.com
도계한지 : www.dogye.co.kr

덧붙이는 글 참고사이트
한지 : www.hanji.com
책임-이승철, 프로그래밍-임채욱, 자료연구-주용범,박혜신, Animation-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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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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