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비판을 넘어 비판적 사유의 획득을

등록 2001.07.30 17:18수정 2001.07.30 19:0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은의 미당 비판이 문학계를 넘어 문화적인 문제, 사회정치적인 문제로 파급되는 것을 보는 나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이문열이나 이인화 같은 작가가 조선일보에 기고문을 보내 스스로 서 있는 정치적 위치를 공공연히 표방하는 것을 보는 마음 역시 불쾌하고 고통스럽다.


그런가 하면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도 언론사 세무조사에 관한 문학인의 견해를 성명으로 발표하고 있다. 내 자신 조선일보의 문학레터라는 코너에 기고를 하고 있는 만큼 어떤 태도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선일보에의 기고 문제부터 나의 견해를 밝힐 필요를 느낀다. 무엇보다 나는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사람이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새로운 면모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뜻의 글을 몇몇 곳에서 밝힌 적이 있고 특히 몇몇 분들의 논조에 대해서는 강한 어조로 비판을 가한 적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조선일보에 기고를 하지 않으려는 분들의 견해를 존중하되, 나는 나대로의 뜻이 있고 내가 생각하는 방법이 있으며 특히 나와 다른 견해와 입장을 수리(受理), 처리하는 나대로의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이는 아집에 기인한 것이어서는 안되고 변명에 속하지 않는, 정당한 논리를 동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두 달에서부터 네 달 전 사이의 문학분야 책을 소개하는 코너이지만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함은 그런 생각에 바탕한 것이었다. 또한 이곳 오마이뉴스의 문화칼럼 연재는 조선일보에의 기고보다 일찍 약속된 것으로서 속된 양수겸장(兩手兼掌)의 뜻은 없다. 그러면서도 여러 상황은 나로 하여금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게 하는 면이 있다.

첫째 오마이뉴스에 연재가 시작되자, 이른바 안티조선이라 하여 조선일보는 사지도 읽지도 말 것이며 그곳에는 쓰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힐난에 가까운 글들이 올라왔다. 나는 그분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그같은 비난성 문장들을 감수하였으나, 그분들의 방법에는 입장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추구하지 않는 뜻이 담겨 있다는 나대로의 생각이 없지 않다.


조선일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뜻이 모두 하나이겠는지? 또 거기서 필봉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 생각대로 그 안의 분들이 모두 인형처럼 움직이겠는지? 조선일보를 사고 읽고 또 거기에 쓰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조선일보의 지금 행태를 이롭게만 할 뿐이겠는지?

둘째 작가 이문열과 이인화 2인의 문장 역시 문학자의 발언치고는 지나치게 정치적·공격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이분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이문열 씨는 지금의 사태를 언론과 정부의 대결로 간주하면서 국세청의 고발이 생중계되고 그 보도가 대량으로 이루어진 것을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국민 선전 선동"에 비유하고 있었다.


또한 언론과 정부라는 "두 기관차가 충돌로 승패를 가름해야 한다면" 그는 "언론쪽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며, 정권은 가변적이어도 언론은 영원하다든가 "언론이 없고 정부만 있는 사회보다는 정부가 없고 언론만 있는 사회를 선택하겠다"든가 하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분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유태인 학살같은 광주학살이 자행되고 그 학살자들이 정권을 탈취한 시대에 무엇을 했는가? 당신의 언론/정부(정권)의 이분법은 마치 현 정부가 '모든' 언론과 대립하면서 언론을 탄압하고 있다는 인상을 선사하는 대국민 선전·선동적 언사가 아닌가?

이인화 씨는 신문에 "필자는 옛날부터 권력을 등에 업고 으스대는 거만한 인간과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설설 기는 비굴한 인간이 말할 수 없이 싫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되었겠지만 작금의 사태는 새삼 저런 것들에게 질 수 없다는 비분강개를 갖게 한다"라고 쓰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저런 것들"이란 누구이며 "질 수 없다는 비분강개"는 어떤 대립과 투쟁의 철학에서 나오는 것인지? 문학인 역시 정치성에서 자유롭지 못함은 물론이지만 적어도 그와 같은 전선의 비판과 공격에서 벗어난 사고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문열 씨를 두둔하는 이인화 씨의 논조는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2인의 동반자적 성격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으나 작금의 사태를 제대로 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앞에서 나는 고은의 미당 비판을 읽으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그 분의 비판이 비판의 한계를 넘어 미당의 예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어떤 사유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일, 아니 식민지체제하 대일협력 문제는 미완의 정치·사회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정신의 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심연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취약성이 어떻게 심미성과 결합해 가는가를 해명하는 것은 미당을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것 또는 미당의 문학을 그의 이력과 관계없이 고평하는 것보다 중요한 탐구주제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 정신의 문제이다. 우리의 문학은 이제 문학인의 대일협력 또는 독재체제협력을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 그같은 기묘함을 해명하는 데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즉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분법적 비판 자체가 아니라 비판적 사유이다.

이문열과 이인화 2인의 문장과 그리고 나의 '양수겸장'을 비판하는 분들의 글들을 보면서도 나는 비판에의 매혹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대립과 투쟁을 완화하고 매개해 줄 장치가 결핍되어 있고 정치든 언론이든 문학이든 자기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는 풍토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요즘과 같은 상황은 서로가 사활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삶은 지속될 것이다. 정부나 언론은 바뀔 수 있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이 위태로운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소통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더 나은 사유를 얻어 그것의 논리를 따라 삶을 실험해 가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이같은 나의 결론이 지금의 상황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이것이 지금의 상황을 수리, 처리하는 나의 절박한 태도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 나의 행로에 대해서 자신할 수만은 없으니 그것이 내 마음 한 켠에 자리잡은 불안의 원인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