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에 깃든 우리 역사 우리 문화

정동주의 책 '소나무'를 읽고 나서

등록 2001.08.04 16:27수정 2001.08.0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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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가 익히 들었던 양희은이 부른 노래 '상록수'이다. 소나무처럼 꿋꿋하고 푸르른 삶을 꿈꾸며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군사독재 시대의 억눌린 가슴을 다독거려주는 위안이었다.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보편적인 상징물이 뭘까? 한글, 김치, 고려인삼, 한복, 호랑이, 태극, 무궁화 등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아 온 것은 '소나무'가 아닐까? 예부터 수많은 전설과 그림, 문학작품 등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임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고향생각을 할 때 늘 떠오르는 것이 마을 뒷동산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소나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정동주는 소나무에 얽힌 한국인의 문화를 탐구한 책 '소나무'(거름출판사)를 냈다. 글쓴이는 서문에서 "어쩌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 속에는 푸른 당상 소나무숲이 드리워져 있는 한 고향은 소나무 마음으로 살아있는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란 그들 마음에서 늘푸른 소나무가 사라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경남 사천 바닷가 언덕바지에 자리잡은 작가의 집에는 글쓴이가 직접 구해 심은 한국 자생소나무 2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책은 이 같은 작가의 평소 소나무 사랑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여러 가지의 역사적 자료, 문학작품, 그림 등을 섭렵한 끝에 나온 설득력 있는 역작으로 보여진다.

글쓴이는 소나무를 우리 역사의 근원으로 본다. 단군신화 등 각종 건국신화에 신단수, 사당목, 본향목, 단수신, 당산나무 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나무들을 소나무로 보는 것이다. 지금도 자식을 객지로 보낸 어머니가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당산나무가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은 솔잎의 푸른색을 절개와 지조, 창조의 상징으로 보았고, 소나무 줄기의 붉은 빛은 단청(丹靑)색의 원류가 됐다.


또 소나무는 장수의 상징인 십장생(十長生:해·산·물·돌·소나무·달 또는 구름·불로초·거북·학·사슴)의 하나였으며 액을 막아주고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상징물이었다. 정월 대보름에는 솔가지를 꺽어 문에 걸어두어 잡귀와 부정을 막았으며, 동지 때는 솔가지를 사용해 팥죽을 사방에 뿌리며 질병을 막았고, 아기를 낳은 뒤나 장을 담글 때도 솔가지는 빠지지 않았다.

소나무는 한국 생활문화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재료였다. 오두막에서 궁궐까지 모든 건물은 소나무로 지었다. 배를 만드는 선박재도 소나무였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관(棺)도 소나무로 만들었다.


겨울철에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고, 밥을 짓는 땔감이었으며, 농기구의 재료였고 부엌살림의 대부분도 소나무였다. 한국인의 삶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고, 소나무로 만든 관에 들어가면서 끝났던 것이다.

소나무는 우리 예술의 훌륭한 소재였다.

이 책에 나온 그림들 중 추사 김정희가 겨울의 스산한 분위기 속에 서있는 소나무 몇 그루를 그린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는 압권이다. 추운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의 생태를 인간적인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이 외에도 이인상의 '설송도(雪松圖)', 정선의 '만폭동(萬瀑洞)', 김홍도의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 '총석정(叢石亭)', 김한동의 '십장생도(十長生圖)' 등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문학작품에도 수없이 많다. 사명당의 '청송사(靑松辭)'는 푸른 소나무에 바치는 헌시였다. 이 외에도 이퇴계의 '영송시(詠松詩)', 유헌주의 '영송도(詠松圖)',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등 소나무가 중심이 되는 한시는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다.

글쓴이에 따르면 한국의 땅이름 중에서 소나무 송(松)자가 첫 음절에 들어가는 마을만 619곳에 이른다고 한다. 오래된 솔이 있는 고송리(古松里), 멋진 솔이 있다는 가송리(佳松里), 늙은 솔의 노송리(老松里), 큰 솔의 대송리(大松里), 향기나는 방송리(芳松里), 솔 세 그루가 있는 삼송리(三松里), 검은 솔의 흑송리(黑松里) 등이다

또 소나무는 '정이품송', '정부인(貞夫人) 소나무' '논개솔' 등 아예 고유명사로 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 백두산의 미인송(美人松), 태백산줄기의 금강송(金剛松), 조선시대 궁궐에서 관리했던 황장목(黃腸木), 곰솔, 반송(盤松), 춘양목(春陽木) 등 산지와 생김새, 소유자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가진 것이 한국의 소나무다.

일제강점기 시절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본의 거물 정치인이 선생의 초가집을 찾아왔을 때,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편 뒤 '우리 응접실'에 앉을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 가서 무서운 영감을 만났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몇 백년 된 소나무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적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새삼 우리 민족과 소나무의 관계를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갖았다. 소나무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 민족이 또 내가 나아갈 바를 분명히 알게 된 귀중한 경험이라 할 만했다.

다만 앞부분에선 약간의 중언부언이 있는 듯하여 다소 아쉬움은 있었다. 하지만 소나무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섭렵한 각고의 노력이야말로 이 책의 진가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많은 그림, 문학작품, 노래, 역사적 자료, 전설, 심지어 서양자료까지 망라한 내용은 글쓴이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거기에 사진작가 윤병삼의 사진은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절절히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사진만으로도 우리 문화 속의 소나무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왔는지 새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소나무의 꿋꿋하고 푸르른 삶을 닮아가는 모습이 되었으면 한다. 모두에게 정말 유익한 책으로 우리 민족, 민족문화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보길 간곡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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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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