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삼선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기억 ①

―고독한 반표(反票)

등록 2001.08.06 07:26수정 2001.08.0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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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주권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최초의 주권 행사―첫번째로 행사한 '투표'가 언제의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어떤 형태의 기억과 기분을 갖게 하는지요?
당신이 젊은 분일 경우, 그 최초의 주권 행사를 제대로 하긴 했는지요?

지난해 봄이었던가요, <한겨레 21>의 '논단'을 아주 멋지게(?) 장식한 배 모라는 여성 작가의 고백 아닌 고백처럼 투표 날 하루종일 개 목욕을 시키고 치장을 해 주느라고, 또 친구가 놀러와서 함께 영화 구경을 하느라고 투표에 불참하지는 않았는지요?
국민의 가장 중요한 주권 행사인 투표에 불참하고도 당신은 떳떳한 마음인지요? 정치 혐오증이나 냉소주의 따위로 그것을 계속 분식하며 변명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투표를 하신 분일 경우, 당신은 그 최초의 주권 행사를 어떤 형태로 하셨는지요? 나름 대로의 냉철한 주관에 따라 비장한 마음으로 하지 않고, 혹 지역감정 따위 저급한 기분이나 주변의 사사로운 분위기에 휩쓸려 아주 가볍게 표를 던지지는 않았는지요?

최초의 떳떳한 주권 행사가 자신에게 계속적으로 명쾌한 기분을 갖게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지요?
비록 그 표가 이긴 표가 아니고 사표(死票)가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평생 동안 긍지와 자랑스러움으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지요?

나는 오늘의 수많은 젊은이들―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는 젊은이들이 그 최초의 투표권을 아주 잘 행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름 대로의 냉철한 주관에 따라 비장한 마음으로 평생의 첫 한표를 잘 던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앞으로의 갖가지 수많은 투표들에 좋은 기준이 되고, 더 나아가 평생 동안 떳떳한 '긍지'로 자리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것에 도움을 드리고자, 어쩌면 하나의 작은 참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30여 전의 내 최초의 주권 행사 경험을 여러분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군대'라는 특수 집단 안에서 생애 최초의 '투표'를 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기억은 내평생에 참으로 소중하고도 자랑스러운 것이지요.

이 이야기가 결코 나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고 광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런 의심이나 오해를 품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1969년 11월 초순.
신병 배출대로부터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로 떨어져서, 연대본부의 인사과 내무반 막사에서 며칠 동안 대기병 생활을 하던 때였지요.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박정희의 과도한 정권욕이 유희(遊戱)를 벌인 또 한번의 욕된 날이었다고 나는 감히 말합니다. 이른바 '삼선 개헌'에 대한 찬반을 가름하는 국민투표―그 투표를 우리도 하게 된 것이었지요.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전국적으로 투표가 실시되는 저 민간 세상의 투표일보다 약 열흘 정도 앞선 날이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이미 며칠 전부터 각 부대 별로 투표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이미 며칠 전부터 투표가 시작되어서 여러 날째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함인가?
어느 하루 적당한 날을 잡아서 연대면 연대의 전 부대원이 각자 편리한 시간에 자유로이 투표를 하는 그런 식의 투표가 아니었습니다. 어제는 ○중대, 오늘은 ○○중대, 또 내일은 본부중대 하는 식으로 순번에 따라, 그것도 소대 순으로 정확히 열을 지어서 전원 투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무엇을 말함일까?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지고 볶고 하지 않아도 어금니에 절로 와서 질겅질겅 씹히는 일이었습니다. '투표'라는 그 요식 행위의 이면에 잔뜩 도사리고 있는 '목표 달성을 위한 효과의 극대화 시도'가 훤히 들여다보이며, 병사들의 손끝에 집히는 투표지 만큼이나 확실하게 감지되는 것이었지요.

하여튼 마침내 그날이 와서, 연대본부의 대기병인 우리들에게도 투표를 해야 하는 장엄하고도 무서운 순간이 닥친 것이었습니다. 우리 대기병들은, 투표장으로 오라는 말을 듣는 그 순간부터 모두 한결같이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어제부터 본부중대의 투표가 시작되어서 인사과·작전과·군수과 순으로 실시되는 것을 보고 듣고 안 까닭에, 오늘쯤에는 맨마지막으로 대기병들의 투표도 실시되리라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투표장으로 오라는 인사과 선임하사의 말을 들으니,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야릇한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온몸을 에워싸는 느낌이었지요.


일단은 한결같이 긴장한 표정들인 내 '더플 백 동기'들은 그러나 나보다는 다소 여유 있는 기색들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3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연대로, 한날 한시에 연대본부에까지 함께 떨어진 우리 더블 백 동기는 나까지 모두 4명이었던 거지요.

그때 우리들은 더블 백 동기로서의 질박한 친밀감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훈련소 배출대에서 2천여 명의 더블 백 동기 거의 모두가 전방으로 팔려 가고, 후방으로 떨어진 동기들은 고작 수십 명에 불과했지요. 그중에서 30여 명 정도가 논산훈련소로 떨어졌는데, 소본부의 대기병 소대에서 상판때기부터 인정머리라곤 손톱 만큼도 없게 생긴 내무반장한테서 걸핏하면 손찌검 발길질에 녹아나며 한 며칠 작신 고생한 끝에 우리 4명이 맨먼저 28연대로 팔려왔던 거지요.

맨먼저 팔려서 소본부를 떠나 28연대로 올 때 우리들은 우리의 행운을 기뻐했습니다. 연대본부에서의 대기병 신고와 대기병 생활이 또 얼마 동안이나 어떤 양태로 진행될지 그 또 한 번의 관문이 호랑이 굴이나 아가리같이 느껴져서 몹시 가슴이 뻑뻑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우리들이 선택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많은 동기들 중에서 우리 네 사람만이 같은 운명의 배를 타고 28연대로 떨어졌다는 것은 정말로 공교로운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의 신기성을 확인하고 되뇌이며, 우리들은 마지막까지 함께 남은 더블 백 동기로서의 '의리'를 잘 지켜 나가기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정말로 그때는 굳은 결속감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확연했던 거지요.

그러나 삼선 개헌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 그 요식 행위에 임하는 마당에서는 단박 우리 더플 백 동기들의 우애에 균열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결속감이니 일체감이니 하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허무 맹랑한 감정일 뿐이었습니다. 아주 부자연스럽고도 껄끄러운 기운이 우리들 사이에 완강하게 형성되는 느낌이었지요.

당연히 찬표를 던져야 한다, 찬표를 던지는 것이 이로울 거라는 동기들의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삼선 개헌을 반대하는 입장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삼선 개헌을 반대하면서도 찬표를 던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 군대에서의 국민 투표가 다만 요식 행위일 뿐이라구 해두, 그러구 반표를 던지는 게 아무 의미없는 일이라구 해두, 난 절대루 찬표를 찍을 수가 없어."
동기들은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이단자를 대하는 듯한 눈매들이었습니다.
"삼선 개헌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하는 그 입장이 중요한 게 아냐, 지금. 우리 대기병 넷이 투표를 한 데서 반표가 하나 나온 것 때문에 우리가 다같이 의심을 받고 해를 입는다면 그땐 어떡할 거야?"
"설마 그런 일까지 생길라구…."
"그렇게 순진하게 놀지 말라구. 그러다가 괜히 남까지 생피 보게 하지 말구!"
"그때는 내가 책임을 지지 뭐."
"어떻게?"
"하여튼 얼릉 가자구. 이렇게 동작이 느리다간 이등병눔들 군기 빠졌다구 된통 쥐어백힐지두 물르니께."

그리고 나는 앞장을 섰습니다. 짐짓 힘차게 걸음을 내딛어 인사과 내무반 막사를 나가는데, 동기들과의 이질감이 가슴 가득 뻑뻑하게 안겨드는 듯싶었습니다.

(내일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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