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만추, 그리고 흐린 날 오후의 스산한 바람결에 나뒹구는 낙엽들을 밟으며 투표 장소인 인사과 행정반 막사에 당도하자 어서 오라는, 우리를 반기는 듯하면서도 실은 위압적인 인사 장교의 목소리가 한 순간 막사 안에 가득 차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잔뜩 긴장한 채 열을 지은 형태로 조심스럽게 한 사람씩 막사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내가 맨앞이었습니다.
막사 안에는 중령 계급을 단 부연대장과 대위 계급을 단 인사 참모, 그리고 중위 계급의 인사 장교와 선임 하사관인 상사, 그외 여러 명의 기간 사병들이 의자에 앉거나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사 참모의 책상 위에 여러 장의 투표지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옆에 인주통과 붓뚜껑이 놓여져 있는 것도 곧바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순간에 나는 모든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막사 안의 모든 종사자(감시자)들이 둘러서서 보는 가운데서, 더욱이 인사 참모가 앉아서 보고 있는 인사 참모의 책상 위에서, 투표지를 활짝 펴놓은 채로 기표가 행해져 왔고, 지금 또다시…! 우리들 역시 그런 식으로 기표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놀라움과 어처구니 없음이 한 순간 내 인식의 날개를 부러뜨릴 듯이 거센 힘으로 와락 달겨들어 가슴에 가득 처안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숨이 막히고 다리가 떨렸습니다. 이럴 수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가슴속의 후끈거리는 불안과 공포로 하여 온몸이 납덩이처럼 굳고 무거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 옆으로 비켜 서며 바로 뒤의 동기에게 간신히 모기 만한 소리로 말했다.
"먼저 찍어."
바로 뒤의 내 용감한 더블백 동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쓱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씩씩하게 인사 참모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흡사 소매를 걷어붙인 양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맘껏 발휘하고 과시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지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붓뚜껑을 집어들어 인주를 찍은 다음 삼선 개헌 찬성 쪽―투표지의 큼지막한 동그라미 부분에다가 힘차게 붓뚜껑을 눌렀습니다.
기표를 하는 것으로 그의 일은 끝이 났습니다. 투표지를 접어 투표함에 넣는 따위, 그런 후속 행위는 아예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여간 기표를 마친 그는 더욱 의기 양양한 빛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기표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더블 백 동기도 용감하고 씩씩한 모습이었습니다. 힘차게 붓뚜껑을 집어드는 그 친구 역시 거지반 팔뚝을 걷어붙인 양이었습니다.
그는 전방으로 팔려가지 않고 후방의 논산훈련소에 떨어진 그 행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말단 중대로까지 내려가지 않고 연대본부에 걸치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일지도 몰랐습니다.
하여간 삼선 개헌 찬성 쪽 동그라미 부분에다가 힘껏 붓뚜껑을 누른 그는 마찬가지로 한결 득의 만만한 표정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나선 친구는 두 친구와는 달리 별로 힘이 없어보였습니다. 갈등의 기색 같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엿보이는 듯싶었습니다. 그는 약간 떨리는 듯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붓뚜껑을 집어들었습니다.
나는 절로 바짝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별수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찬성 쪽에다 기표를 하고 난 그는 한결 풀이 죽은 기색이었습니다.
드디어 내 차례였습니다. 나는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군대라지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또 한 번 똬리를 틀자 또다시 가슴이 후끈후끈, 불안과 두려움이 더욱 곤두서는 것 같았습니다. 오기와 저항심의 자맥질 만큼 불안과 공포의 똬리도 함께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투표지 앞에서 붓뚜껑을 집어든 순간 마침내 마음을 옹골차고 올곧게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짧은 동안이었지만 참으로 번잡 무성했던 가슴속 갈등의 불길을 가라앉히고, 냉철하면서도 비장한 마음으로 붓뚜껑을 들었습니다.
삼선 개헌 찬성 쪽 동그라미에다가 기표를 한다면 오늘 한 순간은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마음이 편할지 모르지만, 그 비겁함과 양심의 가책 때문에 평생 동안 후회하며 마음 아파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 두려움이 참으로 선명했습니다.
삼선 개헌 반대 쪽 가위표에다가 기표를 하여 오늘은 혹 어떤 위난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기필코 평생의 자랑이요 기꺼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너무도 소중했습니다.
나는 정녕 비장한 마음으로 가위표에다가 힘껏 붓뚜껑을 눌렀습니다. 그 순간,
"어, 이눔 보게. 미쳤구만!"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찍어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
(내일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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