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순간 나는 흠칠하였으나 더 이상 별다른 동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기표를 한 투표지의 처리는 내 소관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반대 쪽에 기표를 하였음에도 그것이 필경은 찬표로 둔갑을 하리라는 생각―낮도깨비 형상 같은 게 나를 보며 조롱의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아서, 나는 얼마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곳을 물러나왔습니다.
암울한 비애가 그들먹하게 들어찬 가슴은 더없이 착잡하고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얼마쯤은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나에게 어떤 해가 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하는 나 자신이 모멸스럽기도 했습니다. 이미 분명하게 세운 내 양심의 깃대가 자꾸만 그 무엇들에 침노를 당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내 더블백 동기들은 다만 무덤덤한 표정이었습니다. 나에게 별다른 말이나 짓거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완전 무결한 '공개 투표'가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 건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우리들 4명의 대기병들에게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9중대로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대로 내려가게 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습니다. 내 동기들 세 사람은 모두 연대본부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인사과와 군수과, 그리고 본부중대 행정병으로 그들은 아주 기분 좋게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우리들의 그 투표와 연관되는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월등하게 문교부 혜택을 많이 받은 고학력 소지자들이었습니다. 이름 있는 대학교 졸업자들인 데다가 그들은 또한 용모들이 번듯번듯했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서울 출신인 그들은, 굼뜨고 미련한 충청도 핫바지인 데다가 얼굴도 못생긴 나와는 모든 면에서 본색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이 중대로 내려가고 그들 셋은 연대본부에 머무르게 된 것이 다 가방끈의 길이와 생김새와 때깔에 의해 결정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여튼 9중대로 내려간 나는 신병 신고식을 치른 다음 쫄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등병 주제에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훈련병들 앞에서 폼을 재고 호령도 하며 기간 사병 노릇을 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쫄병은 어딜 가나 천덕꾸러기이고 바쁘기 마련이었습니다. 노상 발바닥에 땀을 내며 바쁘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9중대 신병 생활이 일주일쯤 지난 때였을까. 연대본부의 기간병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기가 바쁘게 또 하루의 오전 학과 출장을 서두르기 위해 식기를 든 채 중대를 향해 급히 뛰어가는데, 누군가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지요하!"
그것은 분명코 내 이름이었습니다. 내 이름을 아주 분명하게 부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발을 멈추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누가 나를 불렀을까. 내 이름을….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지 일병!" 하고 불러도 되고, "야, 임마!"라고 부를 수도 있는 군대 마당인데, 누가 내 사제 이름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를 불렀음직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저만치 연병장 한 켠에서 연대장이 내 쪽을 보고 서 있었지만, 그가 나를 불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나서 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거기다가 식판 내려놓고 이리 가까이 와!" 하는 굵고 묵직한 목소리가 한 순간 내 몸을 얼어붙게 했습니다. 분명코 연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소리였습니다.
나는 땅바닥에 식판을 내려놓고 오금이 저리는 다리로 가만가만 연대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약 십여 보쯤의 앞에 이르자 연대장이 또 말했습니다.
"거기쯤에 서."
나는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깜짝 정신을 차리고는, "며얼공!"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경례를 했습니다.
그러나 연대장은 내 경례도 받지 않고 말없이 대령 계급장이 무겁게도 보이는 모자를 벗더니 그냥 땅바닥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자 위에다 지휘봉도….
그런데 연대장의 한쪽 발 옆에는 배구공이 하나 놓여져 있었습니다. 연대장은 그 배구공을 집어들고 허리를 펴더니, "나허구 토스 좀 몇 번 허구 가" 하고는 나에게 배구공을 튕겨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얼결에 배구공을 맞받아 튕겨 보내며, 실로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손 마디가 얼어붙어서 자칫 실수를 할 것만 같고, 가히 죽을 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십 회를 넘기지 않고 토스는 끝이 났습니다. 연대장은 공을 잡아서 땅에 내려놓은 다음 모자와 지휘봉을 집어들고 허리를 폈습니다. 모자에 묻은 흙을 털고 머리에 쓰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그만 가봐."
"넷! 며얼공!"
나는 경례를 하고 난 순간 잽싸게 몸을 돌리고 마치 줄행랑을 치듯이 빠르게 달려갔습니다. 여전히 도깨비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 온몸을 다 얼얼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녕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무언가가 희뿌옇게, 점차 확연하게 감지되는 듯싶었습니다. 그와 함께 새로운 또 하나의 커다란 의문 부호가 내 앞에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2천 수백 명의 연대 병력 중에서 삼선 개헌에 반표를 찍은 사람은 극소수―어쩌면 나 하나일 수도 있단 말인가?'
어쨌거나 나는 지금도 그 시절, 1969년의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장 문영창 대령의 이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그 일은 분명코 내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므로….
사족(蛇足) 하나
나는 30여 년 전의 내 더블백 동기들의 이름과 모습을 다 잊었지만 (연대장 '따까리'였던 친구는 이름이 신영균이었던가…얼굴도 어렴풋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날의 그 풍경 만큼은 정확하게 떠오릅니다. 어쩌면 그 친구들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친구들이 그날의 그 풍경을 기억할 수 있다면, 반성적 성찰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약간의 부끄러움도 함께 느낀다면, 그것을 '어쩔 수 없었던 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런 생각 만큼 갱신의 의지도 더불어 가지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반성적 성찰과 갱신의 의지 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 친구들이 그것을 바탕으로 그 이후부터는 (또는 지금부터라도) 자신에게 명쾌한 느낌을 갖게 하는 정정당당한 투표를 하며 살아왔고,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사족(蛇足) 둘
1969년의 삼선개헌 역시 국민의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확정이 되었지요. 나는 그때부터 '다수'라는 것의 가치 개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오늘의 안티조선 운동을 벌여 나가는 과정에서도 30여 년 전의 그 풍경으로부터 유래한 '다수'라는 것의 개념과 그 가치 문제를 종종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테니까요.
원래는 오늘 「1969년 삼성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기억」을 끝내고 (끝냈으므로) 내일부터는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기억」얘기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7일) 내 홈피를 방문하여 '조동 독자'라는 익명으로 '토론게시판'에 한마디를 올려놓은 분의 이상한 말씀 때문에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의 그 말씀에 대한 답변글 형식의 글을 하나 꼭 써야만 하게 생겼다는 얘기지요.
'다수'라는 것의 개념과 그 가치 문제도 함께 다룰 그 글을 오늘 써서 내일 인터넷 세상에 띄우기로 하고, 원래 예정된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기억」은 모레부터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1972년 의 유신헌법 국민투표에 대한 기억」을 올릴 예정이고….
무더운 여름철에 악전고투하는 기분입니다만, 즐겁기도 합니다. 내가 힘껏 동참하고 있는 '언론 개혁 운동'이 참으로 뜻있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아직은 성과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목적은 분명하니까요.
계속 열심히 헤치고 나아갈 생각입니다. *
2001년 8월 8일
충남 태안의 반딧불이 작가 지요하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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