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요. 내 경우를 놓고 보면, 우리 집안은 약 250년 전부터 이곳 태안에다 뿌리를 내렸으니까, 이곳 태안을 중심으로 충청도가 고향인 조상님들이 가장 많겠지만, 모든 조상님들을 놓고 보면, 즉 이 그림 속에는 조선 팔도, 삼백육십 여 개의 고을들이 다 들어 있을 거예요."
말 뜻을 알아차린 아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적이 재미있어 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내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집안이 약 250년 전에 이곳 태안에다 뿌리를 내렸다고 하셨죠?"
"그랬지, 방금."
"그럼, 그전에는 어디에서 사셨대요?"
"나도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족보를 놓고 생각을 해 보면, 우리 9대조 할아버님께서 공주 지방으로부터 이곳 태안으로 이주를 해 오신 것 같아."
아이들은 좀더 호기심을 머금은 눈빛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씨는 충주지씨거든. 시조가 되시는 분께서 충주 땅을 터전 삼아 사셨다는 얘기지. 그래서 우리는 관향―원 고향을 충주라고 적어. 호적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본관(本貫)―관향(貫鄕)'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곳 사람일까? 관향은 충청북도 충주이고, 9대조 할아버님께서 이곳으로 이주해 오시기 전에 사신 곳은 공주 땅이고, 내가 태어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태안이니, 나는 정확히 어디 사람일까?"
여러 아이들이 손쉽게 '태안 사람'이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이 지금 사시는 곳이 태안이니까요."
이렇게 설명을 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색다르게 대답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충주 사람이기도 하고, 공주 사람이기도 하고, 태안 사람이기도 해요."
나는 절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잔뜩 흥미를 머금은 눈으로 그 아이를 보자니, 그 아이가 다시 말했습니다.
"저는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태안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제 아빠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셨대요. 그리고 제 엄마는 경상북도 김천이 고향이시래요. 그러니까 저는 경기도 사람이기도 하고, 강원도 사람이기도 하고, 충청도 사람이기도 하고, 경상도 사람이기도 해요."
그리고 호호호 웃는 그 아이가 나는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습니다.
"네 말을 들으니까 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우리 어머니는 수성 최씨(隋城 崔氏)거든. 수성은 경기도 수원의 다른 이름이야. 그런데 수원이 본향인 수성 최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후손인 최영규(崔永奎)라는 분이지. 그러니까 수성 최씨의 원 조상은 경상도 사람이라는 얘기야. 또 그런데 우리 어머니의 고향은 전라북도 전주거든. 그리고 시집을 와서 지금까지 살고 계신 곳은 이곳 충청도 태안이고…. 그러니까, 보미의 말대로라면 우리 어머니는 경상도 사람이기도 하고, 경기도 사람이기도 하고, 전라도 사람이기도 하고, 충청도 사람이기도 하겠네?"
"그렇죠."
보미라는 그 여자아이는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김대중 대통령도 경상도 사람이기도 하고, 전라도 사람이기도 하고, 서울 사람이기도 하겠네?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하의도라는 섬이지만, 본향을 경상남도 김해에 두고 있는 김해 김씨(金海金氏)거든. 그리고 서울에서 오래 사셨고, 지금도 서울에서 사시니까…."
"그렇죠."
보미는 이번에도 자신 있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무슨 뜻이 될까? 나도, 보미도, 우리 어머니도, 김대중 대통령도 다 같이 여러 지방과 결부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결국 우리 모두는 한국 사람이라는 거죠."
나는 속으로 또 한번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의 그 총명함은 그대로 명확하고도 영특한 사리 분별력을 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음 순간 길게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나는 좀더 우울한 표정을 짓고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린 너희들과 같은 생각들을 갖고 산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수많은 어른들이 어린 너희들만도 못한 얕은 생각, 그른 마음들을 갖고 살아서 우리 나라는 정말 문제가 많단다."
"무슨 문젠데요?" 하고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시야가 좁고, 마음과 생각들이 폭넓지를 못해서, 이렇게 이 칠판에 그려진 나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단다. 나무를 보더라도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저 가지 하나만을 보고 그게 전부인 줄 알지. 나무 전체의 중요함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매달려 있는 그 가지 하나만이 중요한 줄 알지.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단다."
나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잠시 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을 입에 올렸습니다.
"너희들, 지역감정이라는 말 들어봤니?"
"네, 많이 들었어요."
"그럼,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고 있니?"
"네, 알아요."
"그럼, 누가 그 뜻을 한번 말해 볼래?"
그러자 경진이라는 여자아이가 또렷또렷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경상도 사람끼리, 전라도 사람끼리, 충청도 사람끼리 똘똘 뭉쳐서 자기들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 지역감정이래요."
"그 이익이란 게 실은 이익도 아니란다. 똥을 된장인 줄로 착각하는 거지."
이런 내 말이 끝나자 경배라는 남자아이도 한마디했습니다.
"그래 갖구 다른 지방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미워한대요."
"그래서 내가 좀전에 한숨을 내쉰 거란다. 다른 지방 사람들을 미워하고 차별하고 금을 그리려는 마음―그런 지역감정을 '망국병'이라고도 부른단다. 나라를 망치는 병이라는 뜻이지. 이런 몹쓸 병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엔 너무 많거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느끼지도 못하고, 또 병을 알아도 스스로 고치려고 하지도 않아.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일이란다."
그러자 보미가 또 말을 내었습니다.
"그럼, 선생님, 그런 사람들도 우리 한국 사람인가요? 그런 사람들은 우리 한국 사람일 수가 없겠는데요?"
"그래, 보미 말이 맞다. 그런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충청도 사람이긴 해도 한국 사람일 수는 없다. 자격이 없는 거지."
그리고 나는 일어서서 오늘의 수업을 정리하는 말을 했습니다.
"지역감정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은 이 칠판의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그림을 보아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꽉 막힌 청맹과니 같은 사람들이란다. 자신이 매달려 있는 가지만 겨우 볼 줄 알고 나무 전체는 볼 줄 모르는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또 어떻게 숲을 볼 수 있겠니. 우리는 절대로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기가 매달려 있는 가지만 생각하고, 나무 전체의 건강은 생각지 않는 사람, 또 나무만 볼 줄 알고 숲은 볼 줄 모르는 사람―그런 답답하고 시야가 좁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논술 공부를 하고 있는 거야. 다음 시간에는 선생님이 지역감정에 관한 슬프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 줄 테니까 잘 듣고 지역감정에 관해서 글을 써보는 거야. 알았지?"
그리고 나는 그날의 수업을 끝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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