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들을 오늘 여기에다 다소 첨삭을 하면서 옮겨보기로 하겠습니다.
1986년의 일입니다. <2000년>이라는 잡지가 있었지요. 박정희 씨의 인척으로 유신 정권 시절에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 장덕진 씨가 발행인이었고, 후일 대통령이 된 노태우 씨로 하여금 잠시 동안이나마 손수 가방을 들고 다니도록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김영삼 정권 초기에 청와대 민정 수석비서관으로 내정되었다가 고졸 학력이며 장인의 재일 조총련 활동 이력 따위가 문제되어 조선일보 등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고 도중 하차하게 되는 전병민 씨가 기획실장으로 활약하던, 당시엔 꽤나 빵빵하게 나가던 잡지였지요.
그 잡지 7월호에 '7월의 논두렁에서 본 여의도 풍경'이라는 르포를 썼지요. 꽤 후한 원고료와 별도의 출장비 덕에 한 일이지만, 그 글을 쓰기 위해 일주일 동안 전국의 여러 농촌 지역을 돌며 제법 세밀하게 취재를 했지요.
하루는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의 한 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입석리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 동네는 충남의 강경읍과 유사하게 생긴 동네였습니다. 동네 가운데에 도계(道界)를 두고 있는 것이었지요. 즉 강경읍이 시내에 충남과 전북의 도계를 두고 있는 것처럼, 이 입석린가 하는 마을은 동네 복판에 경북과 충북의 도계를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계는 폭이 그리 넓지 않은 내(川)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작은 시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그 돌다리의 이쪽은 경상북도 상주군이요, 저쪽은 충청북도 괴산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참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재미로운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동네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실개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실개천의 돌다리가 아니더라도, 동네의 전체적인 모양새를 놓고 보면 '한 동네'임이 참으로 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의 반은 경상도고, 반은 충청도라니….
더욱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은 주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민들에게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구분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돌다리를 빈번하게 내왕하며 서로 '이웃사촌'으로 정답게 사는 모습이 역력하였습니다. 시내 양쪽의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냇물에서 송사리를 잡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동네에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돌다리 근처의 두 가게에 들어가 전화를 한 일로 알게 된 일이었습니다. 먼저 경상도에 속한 가게에서 전화를 할 때는 자동식 전화기였습니다. 그냥 막바로 다이얼을 눌러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신호음을 보낼 수 있는 전화기였다는 얘기죠.
그런데 충청도 땅에 속한 가게에 들어가 전화를 할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 수동식 전화기였고, 교환 아가씨를 거쳐야 하는 전화였습니다.
그 다음에서야 안 일이지만, 충청도에 속한 주민들이 돌다리를 빈번하게 건너가서 경상도에 속한 가게를 많이 들락거리는 것은 그 집의 자동식 전화기를 이용하려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벌써 여러 해 계속되고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이 곧 분노로 변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박정희로부터 시작해서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정권'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는 생각마저 우러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경상도에 속한 주민들로부터 전두환 대통령의 동서인 상주 출신 김모 국회의원 덕을 크게 보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는 뭔가가 아득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충청도 땅에 속해 있는 이웃사촌들에게 미안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충청도 땅에 속해 있는 이웃사촌들에 대해 그들이 혹 우월감 같은 것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몹시 궁금하고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차마 그것을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뜻밖에도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답변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두려웠습니다. 그것을 그냥 궁금증의 영역 안에 남겨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았고, 마침내 나는 그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분명하게 견지하고 있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경상도 땅에 속해 있는 그 주민들이 그때 이미 충청도 땅에 속해 있는 이웃사촌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졌기를 바라는 것―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것을 바랍니다. 지금에서나마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새삼스럽게나마 그 주민들에게 그것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하지만 나는 지금도 막상은 그것을 물어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답변을 듣게 되지는 않을까―그것이 너무도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그때로부터 15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그 두려움이 가시지 않고 있는 현실이, 더 더욱 두려움의 질곡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은 그 모든 정황들이 나를 참으로 슬프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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