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시장 노리는 지구촌 엽기광고

등록 2001.09.26 03:14수정 2001.09.2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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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회사 매니저 헬렌. 버밍햄 전시장의 행사를 위해 유스턴 역에서 아침 9시발 열차를 타야 하는 헬렌은 교통체증을 우려해 택시대신 런던의 지하철 '튜브'를 타기로 맘 먹는다.

지하철 천장의 손잡이 하나를 의지해 출근승객으로 가득한 만원열차 안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느라 애쓰던 헬렌은 문득 손잡이에 끼워진 튜브 모양의 물체를 발견하고 유심히 바라본다. 헬렌은 푸른색의 튜브형 물체가 다름아닌 겨드랑이 암내를 없애는 신형 디오도런트의 모형임을 알아차린다.

한 여름 무더위로 가득한 지하철역까지 한참을 달려 땀에 젖은 터라 혹시 그녀에게서도 악취가 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른 팔을 내린 헬렌은 쓴웃음을 짓는다. 짓궂은 광고지만 이 회사의 디오도런트는 어지간해선 쉽게 잊혀지지 않으리라.

버밍햄행 열차에 몸을 싣고 한 숨을 돌린 헬렌은 창 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철길 옆의 초원에서 희한한 광경을 발견한다. 치즈회사의 커다란 로고가 새겨진 배너를 몸통에 칭칭 두른 젖소 떼 수십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것. 돈 욕심에 눈이 먼 주인 덕에 졸지에 광고판으로 전락한 젖소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미처 연민을 느낄 새도 없이 헬렌은 멀리 밀밭에 새겨진 이상한 형상에 눈을 돌린다. 실눈을 뜨고 밀밭을 바라보던 헬렌은 곧 박장대소를 한다. 유명한 맥주회사 <벡스>의 로고가 밀밭에 새겨져 있었던 것.

유럽과 미국의 광고회사를 중심으로 바야흐로 '엽기광고' 열풍이 거세다. 엽기광고는 TV나 신문 등 값비싼 거대 매체를 이용할 형편이 되지 않는 중소 기업들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광고효과를 거두기 위해 시작한 틈새광고.

지하철의 손잡이에 디오도런트 광고를 부착하거나 젖소에 배너광고를 두르는 데는 푼돈밖에 들지 않지만, 땀냄새로 가득한 지하철처럼 소비자가 처한 순간적 상황에 가장 걸맞는 제품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틈새 전략이어서 광고의 인지도나 매출 효과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런 틈새광고 역시 그 자체만으로 큰 효과를 거두기는 어렵다. 철길 옆에 새겨진 <벡스>의 로고를 직접 볼 수 있는 소비자는 열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 그것도 우연히 시선을 돌린 헬렌 같은 사람에나 한정되기 때문. 따라서 이런 엽기광고는 반드시 홍보활동을 수반한다.


광고배너를 두른 젖소나 밀밭에 새겨진 맥주로고는 그 엽기성 자체로 언론의 주목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적절한 홍보전략만 따라준다면 유력 일간지의 1면을 장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언론의 속성상 기이하고 화제가 될 만한 이야기거리는 기사화될 확률이 높기 때문. '엽기광고'들은 이렇게 주요 매체에 기사화되는 과정을 통해 당초 목표한 소기의 광고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이 기사 자체가 엽기광고의 홍보효과를 증명해주고 있다).


런던 지하철의 디오도런트 손잡이나 밀밭의 맥주로고가 그 자체로서 옥외광고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데 반해 순전히 언론 홍보만을 염두에 두고 창안되는 기발한 이벤트 역시 단골로 애용되는 마케팅 전략이다.

'세계 최대' 혹은 '사상 최초'의 구호를 내거는 기네스 전략이 바로 그것. 미국의 청바지 회사 <리>는 빌딩 하나 크기의 청바지를 만들어 세계 최대의 청바지라는 기네스 기록을 인증 받은 다음 이것을 전 세계의 주요 매장마다 순회 전시해 홍보효과를 톡톡히 누린 바 있다.

세계 최대의 운동화 혹은 세계 최대의 축구공 등도 나이키나 리복 같은 스포츠용품업체들이 애용하는 대표적인 엽기마케팅 기법이다. 이런 엽기적 이벤트는 AP나 로이터 등 통신사의 사진 전송망을 타고 전세계로 배포되어 주요 신문의 해외토픽란을 장식하게 된다. 이런 행사를 치르는데 기껏해야 수십만불의 경비밖에 들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경제적이고 파급력 또한 큰 홍보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사들도 이런 엽기 이벤트에 숨겨진 기업체의 홍보의도를 간파하고 있지만 이벤트 자체가 기네스 기록 갱신이라는 뉴스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이런 엽기적 사진들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도에 큰 저항을 하지는 않는 편이다.

한편으론 엽기성대신 장소나 사건의 의외성에 초점을 맞춘 마케팅 역시 전통적으로 인기를 끌어왔다. 영국의 자동차 회사 재규어는 맨해튼 중심가에서 F-1 경주용차와 뉴욕의 노란 택시가 자동차 경주를 벌인다는 이벤트를 고안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현지 언론의 주목을 이끌어 내었다. 영화 <드리븐>의 한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기발한 마케팅이다.

미국의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 <몬스터 닷컴>은 잔디밭에 자사의 초대형 로고를 새겨넣어 UFO 현상에 편승한 홍보를 기획한 바 있다. 영국의 밀밭에 새겨진 기이한 기하학적 형상이 UFO의 착륙 흔적일지 모른다는 화제거리를 이용한 홍보 전략이다.

한국의 모 광고 대행사는 세종문화회관의 화장실에 뉴스와 함께 광고를 보여주는 LCD스크린을 부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스크린에서 화장실용품이나 여성용품 광고를 틀어준다면 그 광고효과는 시청자가 무심코 지나치는 TV광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TV나 신문 등 기존의 매체를 뒤덮는 광고의 홍수에 소비자들이 갈 수록 염증을 내고 있고 전문가들에게도 점차 그 효과를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소비자들의 생활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엽기광고의 위세는 갈수록 거세질 전망이다.

덧붙이는 글 | jean

덧붙이는 글 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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