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甲寺)에 가을을 만나러 가다

<민족문화 바로알기>

등록 2001.11.08 18:13수정 2001.11.0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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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나는 중학교 교사인 김대규 형 부부를 공주 갑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가 먼저 가을을 만나러 간다 해서 내가 같이 가자고 청을 한 것이다. 집에서 7시 30분에 출발했다. 중부고속도로에는 단풍을 보러가는 사람들의 차가 참 많았다.

3시간 여 걸려서 갑사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매표소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 아직 김형은 오지 않았다. 늦게 출발했으니 기다려 달라는 전화이다.


갑사 부근은 온통 감 천지이다. 매표소 근처의 감나무에서는 한 부부와 아들이 감을 따고 있다. 아버지가 가녀린 나무 위에 올라가서 감을 따면 모자는 밑에서 푸대 자루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받는다. 한 폭의 따스한 수채화이다. 다만 까치밥을 조금은 남겨두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감나무 사이로 바라보이는 가을 하늘은 저만치 높게 떠있다.

매표소에 앞에는 기념품 가게들과 식당들이 많이 있다. 김 형은 내게 식당이름을 일러주면서 KBS 맛자랑 멋자랑에 나온 집이라며 거기에서 보자고 했다. 그런데 웬 맛자랑 멋자랑에 나온 집이 이리도 많은가? 거기 있는 식당의 간판에는 모두 그렇게 써있다. 신당동 떡볶이집들도, 곤지암 소머리국밥집도, 장충동 돼지족발집들도 모두가 원조더니 여기도 똑같은 모양이다.

1시간 정도 기다려 김 형 부부를 만난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많다는 김 형의 말이다. 그는 이곳에 자주 들른다 했다. 공군군악대가 들어간다. 절에 왠 군악대일까?

절 안에 들어가니 오늘은 갑사의 창건 1581주년을 기념한 <갑사 개산대제>와 조선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영규대사 순국 409제 추모제(영규대제)>가 있는 날이란다. 김형은 아주 보기 힘든 행사를 보게 되었다며 기뻐한다. 행사가 행사인지라 장관, 도지사, 각군 참모총장,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한 모양이다. 취타대가 대취타를 연주한다.

아니 이게 무엇인가? 행사장 앞면에는 거대한 괘불이 걸려있다. 이 국보 298호인 <갑사괘불>은 1650년에 제작된 것으로 길이 12.47m, 폭 9.48m 되는 대형 걸개그림이다.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 화엄교리를 설법하고 있는 연화장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이 괘불은 펼치기만 해도 액운이 물러간다는 영험이 전해 온다는 이야기다.


영규대사 행장 소개가 있다. 영규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의 의승군을 규합하고, 갑사 대적전 앞에 우뚝 솟은 33칸의 철당간 위로 몸을 날려 까마득한 꼭대기에 서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라는 사자후를 토해 냈다며 고사를 들려준다.

영구대사는 청주성 탈환에 가장 큰 공을 세우고, 금산성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뒤 죽었으나 그 전투로 인해 호남의 곡창을 왜군의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33칸의 철당간 위에 올라선다? 웬만큼 무술의 고수라도 상상하기 어렵지만 스님들이 수행의 한 과정으로 연마하는 선무도(禪武道)를 조금은 아는 나로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규대제가 끝난 뒤엔 승무, 한량무 등 각종 전통무용이 공연 되었다. 흑바닥에 좁은 장소였지만 공연자들은 신명을 한껏 자랑했다.

갑사는 어떤 절일까?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다. 봄에는 마곡사가 깊은 계곡과 어우러져 풍광이 수려하고 가을에는 갑사가 아늑하여 좋다는 말이다. 갑사는 계룡산의 서쪽, 유성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 계룡산을 왼쪽에 두고 한 바퀴 빙 둘러 가며, 그 의젓한 자태를 구경한 뒤에 다다르는 아담한 절집이다.

갑사는 백제 구미신왕 원년(420)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며, 무령왕 3년(503)에 천불전을 중창했다고 하니 백제 웅진 시대의 주요한 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 때 세웠다고 짐작되는 철 당간과 고려 때의 부도는 옛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대웅전 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모두 불탔던 것을 뒤에 하나둘씩 새로 세웠으므로 지금의 절집들은 조선시대 중· 후반기의 것들이라고 한다.

이 절에는 선조 2년(1569)에 새긴 월인석보 판목(보물 제 582호)이 있다.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엮은 월인석보는 석가모니의 생애와 공덕을 칭송한 것이다. 이 판목은 우리나라에 남은 유일한 것이며, 15세기 당시의 글자와 말을 전해주기에 우리말글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 제 478호인 동종도 둘러봤다. 이종은 조선 선조 17년(1584년)에 만들었으며, 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범종(梵鐘) 양식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소리가 울려나가는 용통(龍筒)이 없는 등 조선시대의 특징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 종에는 갑사사(岬士寺)라는 표기가 있어 절의 이름이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영규대사가 올랐다는 보물 제 256호인 철당간(鐵幢竿)과 지주(支柱)를 찾아봤다. 통일신라 때 세워졌다는 이 철당간은 원래 33마디였으나 지금은 24마디만 남아있다. 당간이란 부처님 말씀을 쓴 커다란 당(幢)을 걸어두는 것으로 절의 큰 행사가 있음을 알리는 통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한다. 또 절의 들머리에 세워져 신성한 땅에 나쁜 액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로도 쓰여져 선사시대의 ‘솟대’와도 비슷한 것이라 하겠다.

지주는 당간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철당간과 지주는 깨달음의 길로 나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의 중심인 돛대를 형상화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철당간의 크기는 지름 50cm에 높이 15m이다.

당간을 본 뒤 오솔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니 바로 갑사 부도(浮屠)가 나온다. 부도는 스님의 유골을 안장한 묘탑(墓塔)이다. 보물 제257호인 이 부도는 고려 시대의 것으로 높이가 2.05m여서 아담한 편이나 조각이 화려하다. 부도의 모양은 팔각형의 지붕을 가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되어있는데 전체적으로 위쪽이 빈약해 보이는 대신 상륜부(불탑의 꼭대기에 있는 원기둥 모양의 장식)에 꽃잎이 살짝 벌어지기 시작한 연봉오리가 어느 정도 보완해 준다.

갑사는 국립공원 계룡산의 한 끝자락에 있는 절로 또 다른 한쪽 끝에는 동학사가 있으며, 등산로로 연결된다고 한다. 그 등산로의 들머리로 가을을 만나러 갔다. 쌀쌀한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는 단풍잎이 떨어져 있다. 아름다운 단풍잎도 다가오는 겨울의 위세에는 어쩔 수는 없는가 보다. 단풍 내음을 맡으며, 가는 가을을 붙잡으려 안간 힘을 써보지만 어찌 자연을 거스를까?

골짜기의 바위 위에 자란 한 이름 모를 나무는 그 큰 바위를 뿌리로 감싸 안고 있다. 물론 자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겠지만 겉으론 보기엔 생존에 걸림돌이 될 것도 껴안고 가는 대범함이 느껴진다 하겠다.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우리는 또 다른 삶의 터전이 있는 것을 어쩌랴? 김형 부부와 우리 부부는 마냥 정담을 나눈다. 그런데 올라가야 할 길은 바쁘니 아쉬운 고별을 할 수밖에.

강호한정가(江湖閒情歌)-한 호

집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안즈랴
솔불 혀지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업다 말고 내여라


풍교야박(楓橋夜泊) - 한밤에 풍교 근처에 배를 대고
장계(張繼) : 당나라 시인

月落烏啼霜滿天 달 지고 까마귀 우는 서리 내리는 추운 늦가을
江楓漁火對愁眠 강교와 풍교의 어선 불빛을 보며 잠을 못 이루네.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저 멀리 한산사의 자정 범종 소리
夜半鐘聲到客船 배에 누운 나그네 귀에 은은히 들려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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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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