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님 인터뷰에 답변드립니다

등록 2001.11.19 23:15수정 2001.11.2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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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문열 돕기운동본부'를 만들고 '책 반환 행사'를 주관한 화덕헌이라고 합니다.

지난 11월 3일 경기도 이천에서 있었던 '이문열 책 반환 행사'로 선생님 마음에 상처를 안겨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사실 행사를 진행하면서 저의 마음도 내내 무거웠습니다. 이 행사가 글쓰기와 문학을 업으로 삼는 많은 분들에게 어떤 '부담감'이나 '불편한 마음'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 지난 11월 3일의 '이문열 책 장례식'. 앞장서는 책 '영정', 뒤따르는 책 '관'.
ⓒ 오마이뉴스 노순택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문열 씨의 '악의적인 발언'이 1개월 이상 주요 언론을 통해 자가증폭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지식인과 문인들이 '침묵'하는 모습을 지켜본 독자 입장에서는 오로지 행사를 잘 치러서 지식인 사회 전반에 왜곡된 '언론 플레이'에 대해 경종을 반드시 울려야겠다는 나름대로의 사명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문열책 장송하다 / 곽기환 기자


대부분의 문인들에게 이 행사가 아주 불편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도 문인으로서 독자들의 극단적인 행동에 대해 원초적인 편견을 가지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책 장례식'을 문학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 볼 때 문단과 지식인 사회의 기이한 침묵이 오히려 더 야속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문열 씨와 정치적인 입장이 비슷한 사람들 입장에서야 이 씨의 신문칼럼에 나타난 악의적인 정치선동이 어떤 카타르시스를 주었겠지만, 언론개혁이나 사회개혁을 열망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작가에겐 최소한 그런 상처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독자에겐 최소한 그런 상처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왜 못하겠습니까?


저는 이문열 씨의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명랑한 민주사회를 위해 기꺼이 그의 입장을 존중합니다. 우리는 이문열 씨의 입장이나 발언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용이지요. 그의 칼럼은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함부로 '홍위병'이라 하여 '빨갱이'와 '김대중 앞잡이'로 몬 것입니다.

이는 '나는 작금의 언론에 개혁이 부당하다고 본다'라든지 '세무조사에 반대한다'는 식의 '단순한 정견'을 넘어선 언어 폭력이고, 정치적인 테러입니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두고볼 때 그리고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 현 상황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선생님, '책 반환 행사'를 두고 "수많은 문학단체의 침묵은 또 뭐냐"고 하신 말씀은 정녕 이문열 씨의 망언이 기승을 부릴 때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문학을 사적 복수극의 도구로 삼는 비열한 작태가 벌어져 '시민단체'를 '북쪽에 동조하는 새 대가리'로, 한 여성 정치가를 '개'로 지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 '문학단체'와 문인들은 다 어디에 갔습니까? 진실로 저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떠한 발언도 없이 그냥 넘기는 건 문학하는 사람들의 도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0월 17일 이문열 씨는 저를 만난 자리에서 저와 저의 부모님의 고향이 전라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책 반환 운동'의 중지를 요구하면서 '문인들'과 '문학단체'를 내세워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문학단체의 침묵'을 지금 와서 문제 삼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문인들과 문단이 일부 몰지각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만 근거로 본 운동을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국에서 책을 보내주신 주부님들, 선생님들, 자영업 하시는 분들, 학생들, 연구원들, 군인, 트럭기사, 농부, 의사 등 150여 명의 독자들의 분노에 찬 음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녕 무엇이 150여 명의 이름없는 독자들로 하여금 저토록 분노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했는지 깊이 생각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홍위병들은 지식인 테러와 언론탄압을 중단하라"11월 3일의 책 장례식때 민주참여네티즌연대 등 이른바 '청위병'들은 부악문원 앞을 가로막고 잠시 장례행사를 강행한 이들과 대치를 벌였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문인의 정치적 발언은 3류 정치가들의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모국어를 모독하면서까지 문인으로서 얻어야 할 정치적 성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적어도 문인이라면 정치적인 발언에서도 진실한 언어와 인간애 가득한 영감으로 투명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단 1권의 책이 반환되어 돌아오더라도 그것을 가슴에 안고 자기 성찰의 자리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문열 씨는 반환된 733권의 책을 두고 자신이 판매한 "2600만 권의 몇 만분의 일도 안되는 숫자"라고 평가절하 하는 오만함을 저질렀습니다. 독자들을 두고 '운동권'이라고 경솔하게 매도했습니다. 제발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역사와 독자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박완서 선생님, 작금의 '문학 위기'에 대해 작가로서, 원로로서 솔직하고도 깊이 있는 성찰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몇몇 오만한 신문들의 왜곡된 시각의 기사만 읽고 섣불리 화내지 마십시오. 아직도 곳곳에는 깨어 있는 독자들과 시민들이 있음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해운대 어느 사진관에서 화덕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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