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내 나이 서른일곱이 되던 해

등록 2001.12.20 15:04수정 2001.12.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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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은 내 나이 서른일곱 살이 되는 해였다. 사람들은 마흔 살을 넘기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서른일곱 살이 고통스러웠으므로 그때는 덜 어려우리라고 생각한다.

달력이 2000년에서 2001년으로 넘어가자, 잠은 이웃집 사는 검둥개가 물어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렸는지 밤 깊어 새벽이 오도록 나는 눈을 붙이지 못했다. 37이라는, 화투판으로 망통이 되는 숫자를 헤아리면서 인생이란 어떻게나 짧은 것이며 또 어떻게나 힘든가 생각했다.


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난히, 황해를 건너온 모래바람이 많고 매웠을 따름이었다.

여름이 가까워지자, 강의 다니는 안성 평야와 입장 포도밭에는 푸른 바다의 내습이 있었다. 바다는 도도한 밀물이 되어 흘러들어 어느새 산자락까지 점령해 버렸다. 3월의 그 황량하던 벌판, 말라비틀어진 풀잎들, 앙상하고 추한 알몸 드러낸 포도나무가 겨울을 잊고 푸르른 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곧 겨울이 올 것이므로 나는 기뻐하지 않았다.

9월 11일이 되자 거대한 기둥 두 개가 불타올랐다. 불길에 밀린 사람들이 세찬 바람 맞는 팔랑개비처럼, 또는 벚꽃잎처럼, 하느적거리며 한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 2001년의 가을은 낙엽이 한꺼번에, 무참히, 떨어져버린 해로 기록되리라. 갑작스레 몰려온 한파가 어제까지만 해도 가지에 붙어 붉고 노란 빛을 뽐내던 나뭇잎들을 추한 몰골 가진 낙엽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거리에서는 은행잎이 무더기로 천하게 몰려다니고 길가 저택의 후박나무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그 커다란 잎새들을 우박처럼 떨구어댔다. 툭툭, 투둑툭, 툭, 툭툭툭……대저택의 담 밑에서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오늘이……12월 20일인가……날 흐리고 벌써 어두운 기운이 서서히 밀려온다. 알콜로 물기 잃어버린 몸 속 여기저기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린다. 해[日]가 떴는가 했는데 벌써 저녁이 오고 있다. 새로운 해[年]가, 세기가 열리는가 했는데 벌써 새 달력을 배달받았다.


오늘밤도 안면도(安眠島)의 바다는 쉼없이 밀려오고 밀려가겠다. 밤새 그 파도 소리, 잠 못 드는 이들을 괴롭히겠다. 바다 비늘처럼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날 포말! 오늘밤 늦도록 내 서툰 삶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겠다. 어디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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