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에 대한 연민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2.01.15 07:51수정 2002.01.15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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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집은 적이 적막한 분위기다. 다섯 식구 중에서 셋이나 집을 떠나 있고, 나와 어머니만 집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문득 마흔 살 이전의 세월로 되돌아간 듯한 묘한 느낌에 젖기도 한다. 결혼하기 전 어머니와 단 둘이 살던 시절의 별로 그립지 않은 회억이며, 그 적막강산 같았던 기운이 공연히 반추되기도 하는 탓이다.

아내는 지난 7일부터 공주에 있는 '충남교육연수원'에서 계속 연수를 받고 있고, 두 아이는 어제 강원도 평창으로 떠났다. 중학생인 딸아이와 초등학생인 아들 녀석의 먼길 나들이는 성당 행사로 말미암은 일이다. 천주교 수원교구 '환경센타'에서 운영하는 강원도 평창의 '성 필립보 생태마을'에서 열리는 '겨울 환경 캠프 및 스키 캠프'에 우리 성당의 '복사단' 어린이들이 참가하게 된 까닭이다.

아들녀석이야 현재 복사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참가를 해야 하고, 이미 1년 전에 계획된 일이라서 매월 1만 원씩 참가비를 불입해 왔었다. 그런데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신나게 썰매와 스키를 타면서 팽이도 치고 연도 날리며 우리의 꿈을 하늘로 실어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초대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장을 본 딸아이가 몹시 가고 싶어했다.

딸아이는 썰매나 스키보다도 '환경' 쪽에 더 관심이 많았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천체에 대한 공부도 할 수 있고, 환경에 관한 색다른 경험들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잔뜩 기대를 갖는 눈치였다.

담당 수녀님께 특별히 청을 해서 딸아이도 동행을 시키기로 했다. 중학생은 2박3일 참가비가 무려 17만 원이나 돼서 너무 비싸다는 느낌이 들고, 없는 살림에 무리를 하는 셈이기도 했지만, 나는 딸아이를 꼭 거기에 보내 주고 싶었다.

초등학생들 틈에 중학생이 단 한 명 달랑 끼어 가는 것이 좀 어색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딸아이는 더없이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관광버스가 떠나는 곳에 가서 배웅을 해 주었는데, 나보다도 어머니가 더 흐뭇해하시는 것 같았다.

자연과 천체 등 '신비의 세계'에 대해 관심이 많은 딸아이는 그만큼 아는 것도 많았다. 수많은 별들의 이름이며, 위치며, 지구와의 거리와 크기 따위를 줄줄이 외고 있는 아이였다. 별 이름을 대면서 지금 보이는 별빛은 무려 백만 년 전에 발광을 시작한 것이라는 등등의 말을 할 때는 나도 다시금 신비스러워지는 기분이곤 했다.

어느새 어린 딸아이로부터 여러 가지를 듣고 배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딸아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는 처지였다. 내가 컴퓨터를 다룰 줄 알게 되고 인터넷을 하게 된 것도 다 딸아이 덕분이었다. 나와 태안문학회가 홈페이지를 갖게 된 것도 내 중학생 딸아이 덕이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 아이가 어느새 중학생이 되고 벌써부터 아빠를 도와주는 녀석이 된 것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머금어지기도 한다. 내가 중학생 시절에 아버지를 도와 수없이 지게질을 한 것이며, 닭을 키우느라고 매일같이 들판을 헤매며 개구리를 잡은 일 따위와 비교를 해 보면 너무도 차원이 달라서 더욱 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다.

녀석은 2박3일의 짧은 동안이지만 강원도 평창의 그 '환경 캠프'에서 색다른 풍경을 접하며 환경에 관한 좀더 많은 '앎'을 얻게 될 것이다. 녀석은 분명히 말했다. '스키 캠프'보다는 '환경 캠프'라는 말에 이끌려서 그곳에 가고 싶어한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이 녀석의 진심임을 믿는다.

녀석의 그 말과 관련하여 나는 약간의 우려도 갖는다. 녀석이 환경에 관한 좀더 많은 '앎'을 얻게 될수록 녀석의 고민도 커질 것이기에…. 녀석은 벌써부터 우리의 환경에 대해서도 제법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긴, 녀석이 걱정하는 것은 환경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쇠락해 가는 국어에 대해서도 녀석은 걱정이 크다. 지난해 가을 수학경시대회에 학교 대표로 출전한 적이 있는 녀석은 집에 와서 흥분한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왜 영어와 수학만 경시대회가 있고 국어는 없느냐고…. 경시대회에서 국어를 제외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런 녀석은 지난해 말 방송사들의 경쟁적인 연말 결산 성격의 연예 프로들을 보면서 연예인들이 곧잘 입에 올리는 "너무너무 감사 드립니다"라는 말에 어처구니없어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빠로 하여금 연초에 <'너무너무'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라는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 글 속에 딸아이에 대한 얘기도 기술이 되므로써, 많은 '독자의견'들에 내 딸아이를 칭찬하는 말들도 자리하게 되었고….

딸아이의 그런 예민함과 이런저런 '걱정'들이 내 마음에도 야릇한 걱정을 심어주고 있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도 하면서, 나는 정말이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딸아이가 벌써부터 그런 걱정들을 가슴에 안고 산다면, 정신 세계의 성장과 함께 그것도 점점 커질 것인 즉, 그것은 장차 큰 비애와 고독감으로도 작용하게 될 것이다.

딸아이가 어쩌면 자신의 '고민의 세계'를 더 키우기 위해 강원도 평창 '환경 캠프'에 가고 집에 없는 지금, 딸아이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야릇한 안쓰러움이 더욱 짙어지는 듯싶다. 불현듯 딸아이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썼던 예전의 글 하나가 떠오른다. 글이 길어지는 것을 무릅쓰고 그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 어린 딸아이의 고민의 세계에 좀더 많은 이들이 동참하게 되기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딸아이에 대한 연민

은근히 딸 자랑을 하는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오늘은 좀 재미있을 법한 딸 얘기를 하나 해야겠다.
올해 중학교 1년 생인 딸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지난해의 얘기부터 하나.

10대들의 우상인 유명한 그룹 가수 한 사람이 공연 중에 몸을 다쳐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입원 소식을 들은 10대 팬들이 병원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들 중 한 명에게 방송사의 기자가 카메라와 함께 마이크를 들이대고 병원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여고생이라는 그 학생이 거침없이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쳐서 입원을 했는데 어떻게 안 올 수 있어요?"
텔레비전의 그 장면을 보던 내 딸아이가 하는 말.
"사랑이라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쓰냐?"

10대 팬들의 극성에 지친 그 유명한 그룹 가수가 몰래 입원실을 옮겼다. 그러나 극성스런 10대 팬들은 그 비밀 입원실마저 찾아내었다. 두 명의 여고생이 그 비밀 입원실을 찾아서 몰래 접근하는 것을 또 방송사 카메라가 잡았다. 기자가 그렇게 극성스런 이유를 물으니 그 여고생들은 또 거침없이 대답했다.
"사랑하니까요."
그 장면을 보던 내 딸아이가 또 하는 말.
"사랑할 데가 그렇게 없냐?"

나는 그날 많이 웃었다. 딸아이가 여간 대견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연예인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그 방면에 관한 지식도 꽤 많은 편이고, 신세대 그룹 가수들의 노래를 좋아해서 공부를 하면서도 길래 요란스런 테이프를 틀어놓질 않나, 차를 가지고 가족이 나들이를 할 때마다 나로서는 귀만 아프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노래 테이프를 한 보따리씩 가지고 다니며 어른들을 괴롭히질 않나…나는 적이 못마땅하고 은근히 걱정도 많던 참이었다. 그러나 딸아이의 그날의 그런 태도를 보고는 완전히 걱정을 놓게 되었다.

그렇지만 또다른 걱정 하나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생 아이의 고등학생들에 대한 그런 경멸의 태도가 그저 재미롭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아이의 그런 시각이 장차 '깨어 있는 사람의 고뇌'로 자라나는 게 아닐까? 필경은 그러리라는 예감 같은 것의 작용 때문이었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학교에서 급우들과 이런 저런 화제들을 가지고 논쟁도 제법 하는 모양이다. 한 번은 4라는 숫자 때문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숫자 4를 기피하면서 그것을 재수 없는 수로 여긴다고 했다.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내 딸아이가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숫자 4는 중국 글자인 죽을 사(死)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4는 참으로 좋은 수이다. 우리 몸도 사지로 되어 있고, 우리가 공부하는 책상도, 밥을 먹는 밥상도, 자동차 바퀴도 네 개이지 않느냐? 그리고 계절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지 않느냐? 4라는 수를 싫어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로 논리 정연하게 반론을 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공감을 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라면서….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하는 딸아이는 너무 어처구니없고 속이 상한 눈치였다. 나 역시 안타까운 마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중학생 아이들의 숫자 4에 대한 그런 오도된 인식은 어른들의 무지와 미망(迷妄)으로부터 연유한 것임이 너무도 분명한 까닭이었다.

아이들 중에는 어른들의 잘못된 지역 감정 따위가 그대로 전이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한 아이가 우리 충청도는 자민련을 지지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여러 아이들이 동조를 해서 아이들 사이에 또 한번 논쟁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중학교 1학년의 교실 풍경이 다소 놀랍기도 하지만 아직은 가치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이들의 한계가 조금은 안타깝게 또 재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른들의 사고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순박성을 생각하면 어른들의 책무가 더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딸아이가 은근히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행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개성'이라는 아빠의 말에 공감하여 유행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딸아이가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어쩌면 고독한 '고뇌의 숲'을 헤쳐나가며 살아야 할지도 모를 딸아이의 장래가 지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오도되기 쉬운 대중의 속성과 실상 앞에서, 무지와 편견과 미망으로 뒤덮인 울울창창한 고뇌의 숲을 헤쳐나가야 하는 그 고달픔은, 아빠를 닮지 말아야 할 텐데…. *

(2000년 <태안신문>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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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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