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께 축복의 인사를 드리며

설 잘 쇠십시오

등록 2002.02.11 14:16수정 2002.02.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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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9일)는 내 선친의 기일(忌日)이었지요. 아침에 「선친의 16주기를 맞으며」라는 글을 써서 인터넷 세상에 띄운 후로는 일체 글쓰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해미에 가서 물을 길어오고, 제사 준비를 하고, 제사를 지내고 하느라 시간 여유도 없었지만, 선친의 기일에도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불경'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요. 선친께서 글을 쓰며 사신 분이었기에 선친의 기일에 내 글을 쓰고 발표하고 한다는 것은 선친께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천주교 신자임을 알고 있는 분들 중에는 '제사'라는 말에 대해 모종의 의구심을 가지실 지도 모르겠군요.

천주교 신자들은 부모와 조상님들의 기일에 제사를 지낸답니다. 물론 집에서의 제사 대신 성당에서의 '위령미사'로 대신하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제사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요.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도 대다수는 성당에서 별도로 위령미사를 지내고….

나도 그런 축이지요. 우리 가족 모두 매번 참례하곤 하는 금요일 저녁 미사를 택해, 지난 주 금요일 저녁 미사에 선친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했답니다. 그러고 나서 엊그제 기일을 맞아 형제 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낸 거지요.

개신교 신자였던 내 아내의 말에 의하면 개신교 형제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사 행위를 '우상 숭배'로 보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개신교 형제들은 상가에 가서 문상을 하면서도 망인에게 절을 하지 않는답니다. "나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절하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근거로….

천주교는 우리 한국인 가정의 제사 행위를 우상 숭배로 보지 않습니다. 하느님 이외의 신에게 제를 지내고 경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분명히 살다가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님들을 기리는 행위―미풍 양속으로 보는 거지요. 우리의 삶을 더욱 품위 있게 하는 아름다운 전통 문화로 보는 거지요. 더 나아가 이런 아름다운 풍습이나 문화 역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지혜'의 소산으로 보는 거지요.


나는 천주교 신자로서 그것을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부모와 조상님들의 기일에 가족이 모여 조상님들의 유덕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고 하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지요.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님들께 제사를 지내고 절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잘못'으로 보실 만큼 하느님께서 옹졸하신 분은 아니시라는 얘기이기도 하겠지요.

내일이면 우리 모두 설 명절을 맞게 됩니다. 이미 설 연휴―명절 분위기는 시작되었지만….


설날 아침에는 또 차례를 지낼 겁니다. 과거에는 집안의 장손이신 사촌 장형님 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성묘까지 하고 나서 성당으로 바삐 달려가곤 했는데, 동생들이 모두 결혼하고 그 가족들이 맏이인 내 집으로 모이다보니, 그들 모두를 이끌고 종가 댁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고, 장남이 집을 비운 채 계속 종가 댁을 가는 것도 옳지 않은 일 같아서, 몇 년 전부터는 내 집에서 삼형제 가족이 따로 차례를 지낸답니다. 차례를 지낸 후에는 어머님께 모두 세배를 드리고, 아이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그러고 나서는 모두 성당에 가서 '조상님들을 위한 미사'를 지내지요.

성당에서의 설날이나 추석날의 '조상님들을 위한 미사'는 좀더 특별한 풍경이랍니다. 신자들은 각 가정에서 마련한 음식 한가지씩을 가지고 오는데, 그 음식들을 모두 제대 앞에 진설을 한답니다. 그 앞에는 향대(香臺)와 향그릇을 놓고….

미사 중의 '봉헌'시간에는 가족별로 차례로 제대 앞으로 가서 가족 대표가 분향을 한 다음 모두 허리 굽혀 절을 하지요. 그럴 때는 은은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데, 어느덧 향 내음이 성당 안에 가득 차서 경건하고 진숙한 분위기가 한결 고조되지요.

미사 후에는 제대 앞에 진설했던 음식들을 모두 성당 밖 너른 마당으로 옮겨놓고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 모두 한데 어울려 즐겁게 음식을 나누지요. 말하자면 음복을 하는 거지요.

그 음복 행사까지 끝나고 나서야 우리 가족은 종가 댁의 친척들과는 별도로 성묘를 한답니다. 친척 중에서 우리 집만 천주교 신자 가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리하지요.

어쩌면 명절 행사 중에서 성묘가 가장 즐거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12인승 승합차에 삼형제 가족이 모두 타고 십 리 안팎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8대조부모님의 효열정문(孝烈旌門)부터 시작해서 선산에 계신 증조와 조부모님, 두 분 백부모님 묘소를 찾아 뵙고, 마지막으로 우리 태안 천주교회 공동묘지에 계신 선친의 묘소를 찾아 뵙는 그 성묘 행사는 매번 즐겁고도 엄숙한 기분을 갖게 하지요. 마음이 절로 정갈해지는 기분도 갖게 하고…. 아이들도 무척 재미있어 하는데,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도 절로 들곤 하지요.

내일도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면 점심을 먹고, 그러고 나면 대전에서 사는 막내 동생네 가족은 다시 돌아갈 겁니다. 우리 집 뒷동에 사는 가운데 동생은 가족과 함께 가까운 처가에 갈 테고….

나도 몇 년 전까지는 명절날이나 다음날 공주 처가에 가곤 했지만, 점점 길이 너무 막히고 내 나이도 늘어나고 해서 슬그머니 그것을 포기하고 말았지요.

내일 점심 식사를 끝으로 막내 동생네 가족이 돌아가고 나면 또 한번 시간의 빠름을 절감하겠지요. 동생네 가족이 오는 것과 가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만 같은 느낌도 다시 들 테고….

이렇게 우리 모두는 빠른 시간 속에서 산답니다. 유수 같고 화살 같은 세월 속에서….

그래서 나는 시간의 주인이시고 영원 자체이신 하느님―절대자의 존재를 더 많이 생각하며 산답니다. 허무한 이 세상의 현실적 가치에 얽매어 살기보다는 그것을 초월하여 저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시금 되새기며….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이번 설은 더욱 의미롭고도 즐거운 명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설 명절을 쇠시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시기를….

저는 새해에도 변함없이 미약하게나마 '참된 세상을 꿈꾸기 위한' 글쓰기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내 본연의 소설 쓰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 볼 생각입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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