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힘의 외교' 믿는 평화주의자?

<미국여행기 13> '닉슨 도서관'을 찾아서

등록 2002.02.20 07:31수정 2002.02.2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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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2월 세 번째 주 월요일은 '대통령의 날'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과 링컨을 기념하는 공휴일인데, 항상 2월 셋째 주 월요일로 정해진 덕분에 미국인들은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일간의 연휴를 즐길 수 있다. 셋째 주로 정한 것은 링컨의 생일은 2월 12일이고, 워싱턴의 생일이 2월 22일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워싱턴과 링컨을 기념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달러에 이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워싱턴과 링컨의 이름을 딴 도시, 학교, 그리고 이름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주(워싱턴주, 서북쪽 끝에 캐나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다) 이름으로 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워싱턴과 링컨에 대한 미국인들의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여행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있다. 캘리포니아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이다. '대통령의 날'에 LA근교에 있는 닉슨 도서관에서 기념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행했다. 미국인들에게 닉슨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워터게이트와 닉슨

LA동남쪽 작은 도시 요바 린다 시에 있는 '닉슨 도서관'. 이곳에는 닉슨의 생애에 관한 모든 것이 보관되어 있다. 태어나 9년간 살았던 생가에서부터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케네디와 주고받았던 편지,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사용했던 버튼과 유세차량, 대통령 재임시절에 각국의 정상들로부터 받은 진귀한 선물들, 그리고 닉슨의 묘소까지. 이 곳은 닉슨에 관한 많은 자료와 업적을 소개해놓고 있는 곳이다.

이 도서관은 닉슨이 노년에 접어든 1990년에 건립되었다. 살아 있는 자신을 기념하는 도서관이 만들어지는 행운을 누린 닉슨은, 1994년 죽은 후 도서관 내 정원에 있는 자신이 태어났던 생가 옆에 묻혔다. 닉슨의 묘비에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조정자, 중재자)이라는 가장 명예로운 경력을 가졌다"라고 적혀 있다. 재임 시절에 '데탕트 외교'의 성과로 불리는 냉전시대 화해무드를 조성한 것이 세계평화정착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는 의미다.


닉슨(1913-1994)은 우리에게도 친근한 이름이다. 1970년대 냉전시기 중국과의 화해무드를 상징했던 '핑퐁외교'는 미국이 외교적 방법을 통해 평화정착에 이바지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핑퐁외교가 외교적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닉슨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반면에 그가 자주 거론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이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정치사에 최대의 스캔들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권력층의 부정부패에 관련된 사건을 언론에서 '***게이트'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이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의 핵심 참모들이 사주한 도둑이 워터게이트 건물에 입주해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해 각종 서류들을 훔치려다 경비원에게 잡혀버린 사건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은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있던 민주당의 활동 정보를 얻기 위해 벌인 단순 절도사건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고 또 그 사실을 거짓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통령의 탄핵을 위한 미 하원 법사위원회 조사가 벌어지게 되고, 마침내 닉슨은 1974년에 스스로 사임하게 된다.

'힘의 외교' 믿는 평화주의자?

닉슨은 재임기간 미국의 국익을 위해 '힘'을 통한 '평화정착'이라는 현실주의자들의 정책을 선택했다. 현실주의자들은 '팍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평화의 여신) 로마나'와 '팍스' 브리테리카' 시기와 같이 강한 미국만이 세계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닉슨은 이것이 바로 미국의 이익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닉슨과 함께 세계 각국에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군사력과 더불어 협상, 즉 힘의 외교방식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무정부시대가 오는가 (코기토, 2001)>에서 닉슨과 키신저가 펼친 현실주의적 정책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형성되는 정치적 감수성"이라며,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강조한다. 현실주의는 "자신에게 주어진 카드를 능수 능란하게 운용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다.

닉슨은 "무질서는 부정의(不正義)보다 나쁜 것"으로 생각했다. 이유는 "부정의는 단지 세계가 불완전함을 의미할 뿐이지만 무질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정의를 박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무질서의 개념은 부시의 불량국가 개념과 너무나 유사해 보인다. 결국 이들 나라에 대한 규정 또한 미국적 시각에 의한 것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정치적 신념은 미국이 세계경찰을 외치며 제 3세계 국가들의 무질서를 해소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에서 정의롭지 못한 방법(요인 암살, 정권 전복, 테러 지원, 테러용인)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을 승인했다. 미국의 국익을 위한다는 닉슨과 키신저의 정치적 신념은 결국 크메르루즈의 정권장악을 도와주고 캄보디아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전임 존슨대통령에 이어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어 성과를 올리지 못한 닉슨은 캄보디아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개선을 통해 베트남을 억누르면서,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무질서만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의 뜻에 따르지 않는 국가들이 늘어나는 것은 곧 무질서로 인식했다.

워터게이트도 어떻게 보면 이러한 닉슨의 인식에서 나온 유사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닉슨이 원한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무질서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국내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워터게이트를 통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견제하고, 해외에서는 힘의 외교를 통해서 그가 생각하는 무질서 국가들을 통제했다. 그런데 묘비에는 '닉슨은 평화주의자(조정자)'라는 단 한 줄의 표현만이 기록되어 있다니.

부시는 어떻게 기록될까

나는 미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꼭 방문해야 할 곳으로 이곳을 꼽고 싶다. 미국의 대통령들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고, 어떻게 미국인들에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닉슨 도서관처럼 좋은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평화주의자'라는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평화의 본질이 결국에는 '힘'이라는 인식은 오늘의 미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역사를 깊게 볼수록 미래를 멀리 내다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힘을 통한 평화정착을 위해서 타국의 주권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미국에 의한 또 다른 살인을 묵인하는 지금의 미국 현실에서 보면 말이다. 또 다시 미국의 힘을 통한 세계평화를 외치는 부시의 묘에도 '평화주의자' 혹은 '평화 중재자'라는 수식어가 붙을까? 한반도에서 벌이고 있는 지금 그의 행보를 잘 지켜보면서 먼 훗날 다시 미국을 여행해야겠다. 그리고 그의 기념관에 들러봐야겠다. 묘비에 어떻게 적혀 있을지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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