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할 줄 아는 아이

등록 2002.03.08 09:35수정 2002.03.08 10:4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네살배기 내 조카딸에 대한 얘기 하나 더 들려 드리겠습니다. 내 하나밖에 없는 조카딸 규빈이가 엊그제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엊그제 엄마와 함께 처음 '어린이집'에 가서 입학식을 하고 온 규빈이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우리 집에 와서 큰 엄마에게 내밀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큰 엄마, 이거 우리 선생님이 우리 엄마께 주신 거예요. 우리 선생님이 주신 거니까 큰 엄마두 읽어보세요."

아이가 '우리 선생님'이라는 말을 강조한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그 쪽지를 들고 와서 굳이 큰 엄마에게 읽어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어린이집에 입학한 사실을 알리며 은연중 자랑하려는 속셈임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웃음을 머금으면서도, "규빈이 선생님이 규빈이 엄마헌테 주신 건데 왜 큰 엄마두 읽어본다니?"하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래두 읽어보세요."
"그럼, 네가 소리 내서 읽어봐. 큰 엄마가 들어줄 테니께."
"전 아직 글 못 읽어요."

이 대목에서 할머니의 관심(일종의 조바심)이 표출되었습니다.

"아니, 말은 그렇게 잘 허면서 여태까지 한글을 뭇 읽어? 니 엄마는 여태까지 뭐 했다니? 애가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도록 한글두 안 가르치구…."
"유치원이 아니구 유아원이에요, 어머니."


아내는 규빈이가 아직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아니라는 뜻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나는 좀더 적극적으로 제수씨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잘 허는 일이에요. 어린아이헌테 일찍부터 애써 글을 가르칠 필요 없어요. 글보다두 말을 잘 가르쳐야 해요. 규빈이가 아직 글을 읽지는 뭇허지먼 말을 얼마나 잘해요. 어른에게 꼭꼭 존댓말을 허구, 자신을 '저'라구 허잖남요. 요즘 그렇게 말허는 아이, 드물어요."


내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건 그려. 얘 엄마가 얘헌티 말허는 법 하나는 잘 가르쳤어."

제수씨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나중에 딸한테서 할머니와 큰아버지의 말을 전해 들을지도 모르고…. 제수씨가 아이를 잘 가르치고 있음이 어머니로부터도 확실하게 인정받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는 좀더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돌아와서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쓰는 일에 '발동'을 걸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수씨가 규빈이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규빈이는 어린이집의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작은 가방까지 메고 있었습니다.

"아주버님, 지금 바쁘시대요?"

나는 제수씨의 미안한 표정에서 뭔가를 직감하고 규빈이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아이의 표정에는 조바심 같은 것이, 그리고 어떤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이 가득 어려 있었습니다.

"길에 나가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어린이집 차가 오지 않네요. 제가 늦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얘가 어찌나 발을 동동거리는지…."
"아, 그류? 그럼, 얼릉 가유."

나는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선뜻 일어섰습니다. 내 조카딸 규빈이가 어린이집에 입학을 한 후 첫 번째로 가는 날이었습니다. 규빈이가 제 시간에 어린이집 차를 만나지 못해 잠시 발을 구르긴 했지만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큰아버지 덕에 별 어려움 없이 어린이집에 갈 수 있게 된 것은 그 어린아이에게도 일종의 '가족애' 같은 것을 확실하게 실감시켜줄 것이었습니다.

규빈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만리포 방향으로 2킬로미터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제수씨가 가까이에 있는 어린이집을 외면하고 멀리에 있는 어린이집을 택한 것은 친구가 운영하는 집이기 때문이지만, 나로서는 한적하고 아늑한 변두리 야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우선 마음에 들었습니다. 논과 밭을 끼고 있는 곳이어서 아이들이 흙 냄새와 풀 냄새 속에서 많은 자연 생물들을 쉽게 접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런데 어린이집에 도착하여 제수씨와 규빈이가 차에서 내릴 때였습니다. 나는 규빈이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큰아버지, 고맙습니다."

제 엄마가 하라고 시켜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차에서 내리면서 아이 스스로 한 말이었습니다.

"응, 그래. 잘 놀다 와."

나는 대꾸하면서 흐드러지게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인사를 할 줄 아는 어린아이의 소견도 기특했지만, 어린아이가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안다는 사실이 참으로 대견스러웠습니다. 어린이집 차를 만나지 못해 잠시나마 발을 동동거렸다는 그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아이의 그 고마운 마음은 참으로 진심일 터였습니다.

제수씨를 태우고 돌아오면서 나는 내 조카딸이 다니기 시작한 어린이집을 마음 속으로 축복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내 조카딸이 그 어린이집에서 더 많은 것들을 제대로 배우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어린이집의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조급하게 글과 숫자를 가르치려 들지 말고, 우선 '말'을 제대로 가르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성의 싹을 잘 심어주고 키워주는 어린이집이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