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다농아원 정문을 겨우 넘었지만

에바다 이사 2명, 15미터 진입 뒤 쫓겨나

등록 2002.03.21 17:32수정 2002.03.2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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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이사 두 명이 극적으로 에바다 농아원 땅을 밟았다. 정문에서 겨우 15미터쯤 안으로 들어갔다가 2~3분 정도만에 밀려난 게 고작이었지만, 이사가 된 지 8개월만에 그렇게도 그리던 농아원 땅을 밟아볼 수 있었던 것은 감격이었다. 주인공은 송북교회 담임목사인 우철영 이사와 에바다 공대위 공동대표로 있는 나였다.

우리 둘은 21일 오후 1시쯤 에바다 농아원 정문에 다다랐다. 정문을 10여 미터쯤 앞둔 곳까지 갈 때까지 정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위실 문이 열리더니, 어른 너댓 명이 승합차(경기72고 9857)에 몸을 가린 채 쏜살같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우철영 이사도 바로 뒤따라 들어갔다. 방금 들어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15미터쯤 들어가 학교와 농아원으로 갈라지는 길까지 이르렀을 때, 앞에서 해고 직원 양아무개 씨가 슬리퍼를 신은 채 뛰어나오며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어른들은 원생들을 앞세우지 말고 전면에 나서라"라고 쓴 피켓을 보여주며, 손짓으로 "어른들 나오라고 하라"고 했다. 그러나 양 씨는 막무가내로 밀어낼 뿐이었다. 바로 뒤 이어 후배 원생들이 쫓아나와 우리 둘을 밀어냈지만 이들의 행동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았다.

정문에는 세 개의 대자보 판이 있었는데, 한 판은 공익 이사들을 비난하는 글, 다른 두 판은 오늘 내가 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듯, 나를 비난하는 글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공대위 이사놈들아, 평택경찰서 앞에서는 우리를 다 잡아가라고 협박·압력을 행사하면서 여기 와서는 '사랑해요'라고 하느냐(사랑 안해가 맞을까?). 너희들의 언론을 이용하려는 비열한 이중성을 모를 것 같으냐, 또라이들아"

"김용한!! 부모가 땅 팔아서 공부시켰으면 돈 벌어 부모님이나 공양할 일이지 평생 남 괴롭히는 일만 앞장서는구나. 그러면서 아직까지 마누라 등 쳐먹고 사느냐. 장애인을 길거리로 내몰려고 주접 떨고 다니면서 평택시장 출마가 왠 말? 저기 봐라. 지나가던 개가 웃는구먼."



양씨는 연신 그 판을 읽어보라며 "대화 필요 없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내가 피켓에 "우린 땅이 없어" "평생 남 괴롭힌다고 썼는데, 여기서 '남'(매직으로 동그라미를 치며)은 도둑들이야"라고 써서 보여주자, 양씨는 짐짓 피하려고 했다. 후배 원생들도 단단히 주의를 받은 듯, 피켓은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나는 "추운데 원생들 고생시키지 말고 어른들더러 나오라고 해. 추운데 뒤에 숨어 갖고 원생들에게만 나가서 정문 지키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른들이나 선배들이나 모두 비겁하고 나쁜 사람들이야"라고 써서 보여주었다.


또 양 씨에게는 "양00 씨, 양 씨 뒤에서 시키는 어른들 나오라고 해"라고 써서 보여주었다. 양 씨는 나에게 매직과 판을 달라고 하더니 "누군지 모르겠어요"라고 썼다. 자기 뒤에서 시키는 어른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다시 판과 매직을 돌려 달라고 하자, 그는 판을 농아원 안으로 가져가 버렸다.

그러는 사이 다른 원생 이아무개 양은, 우철영 이사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피켓 두 개를 재빨리 낚아채 가지고 안으로 도망가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피켓을 가지고 들어갔던 이 양이 담장 안쪽에서 나타나 웃으면서 "빨리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 그는 이사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입말을 할 줄 아는 원생이었다. 나는 웃으며 해를 가리킨 뒤 "해가 이렇게 떠 있는데, 잠을 자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가져 간 피켓을 가져오면 가겠다"고 흥정을 시작했다.

나중에 이 양은 엄지와 집게로 원을 그려 보인 뒤 입말로 "만 원"을 외쳤다. 만 원을 주면 빼앗은 피켓을 가져오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공부할 테니 돈 달라'던 개구쟁이 딸들이 생각나 웃었다.

잠시 뒤 이양이 피켓을 가져왔다. 나는 지갑에서 1천 원짜리를 하나 꺼내 들고, "만 원은 없고, 천 원은 주겠다"고 하자, 이 양은 1천 원은 자기도 있다는 듯, 1천 원짜리를 보여주며, 계속 만원을 요구했다.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완전히 장난끼로 가득 차 있는 아이였다. 그렇게 흥정하고 있는데, 선배인 듯한 남자 원생이 다가가 그 피켓을 빼앗아들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피켓을 안 가져오면 여기서 자겠다"고 썼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한 아이가 피켓을 김 이사 앞에 던졌다. 그러나 피켓도 사진도 글씨도 완전히 다 찢겨 있었다.

우철영 이사가 한마디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기도도 하고, 어떻게든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일해 보려고 이사가 되었는데, 너희들이 이러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고, 실망스럽다."

두 이사는 손가락으로 사랑한다는 표시를 한 뒤, 그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두세 발도 안 가서 뒤돌아보자, 아이들은 벌써 세 판을 치우고 있었다. 모진 황사바람에 아이들이 정말 추웠던 모양이다. 좀더 일찍 돌아올 걸...

이 추위에 아이들을 내세워 정문을 가로막는 어른들은 누굴까? 그들에게는 공식 대표가 없다. 옛 재단측 이사가 네 명 있지만, 어느 누구도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농아원장은 없고, 직무대행이 있었지만, 새 이사회가 신임 원장을 공채하면서 자동으로 직무대행은 사라졌다. 그는 에바다 학교의 행정실장도 겸하고 있었지만, 이미 해고되었다. 그 사람들이 고용한 사감이나 총무가 있지만, 이들이 옛 재단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안다. 끝으로 옛 재단 편을 들고 있는 평교사들도 있지만, 그쪽 교사들에게는 대표성을 띠는 교사도 없다.

공익 이사들이 대화를 하자고 하지만, 누구랑 대화를 나눠야 할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숨긴 채, 불쌍한 원생들이나 앞세우고 있는 비겁한 어른, 나쁜 도둑 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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