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머니

등록 2002.04.01 08:34수정 2002.04.0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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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엄마가 학교에 왔다. 교무실 문을 열며, 마치 못올 데라도 온 듯이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고, 문가에 앉은 선생에게 가만히 다가가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더니, 아마도 담임 자리를 묻는 것이었을 테지, 내게로 조심조심 걸어왔다. 무릎을 덮는 스커트자락조차 조심스럽다.


"맹 선생님이시죠?"
코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꾸벅이며 내게 말을 건넨다. 그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출렁인다.
"예 그렇습니다만....."
나는 말꼬리를 흐린다. 예고 없이 학부모가 찾아오는 경우, 괜히 찜찜하다.

"저, 재현이 엄맙니다."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다. 나도 얼른 엉거주춤 일어나 허리를 굽힌다.

"여기 앉으시지요."
나는 마침 빈 옆자리를 권한다.

"예, 예."
재현이 엄가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또 허리를 굽히고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무슨 일이신지..."
"휴우."
내 물음에 재현이 엄마는 우선 한숨부터 내쉰다.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우선 마음부터 안정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커피를 한 잔 타 내민다.


"한 잔 드시죠."
재현이 엄마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공손히 들어 입에 가져다 댄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런 재현이 엄마만 쳐다본다. 뜨거운 커피를 살살 불어가며 몇 모금 마시고 난 재현이 엄마가 비로소 마음이 좀 진정이 되는지 입을 연다.

"우리 재현이가 속 많이 썪여 드리지요?"
재현이는 반편성 고사 결과 우리반에서 꼴찌다. 덧셈 뺄셈도 능숙하지 못하고, 책 읽는 것도 더듬더듬이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여리고 고와서, 다른 친구들의 어려움을 도맡아 나서기도 하고, 어쩌다 힘 센 아이들이 툭툭 쥐어박아도 화낼 줄조차 모른다.


"속을 썪이긴요. 아이가 얼마나 착한데요."
나는 무슨 말이냐며 손을 내젓는다. 그런데 재현이 엄마는 그 한마디에 그만 눈가에 눈물이 글썽인다.

"공부도 잘 못하고요...."
"공부야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아이들이 모두 다 공부 잘 할 수 있나요? 잘 하는 아이도 있고, 안 그런 아이도 있는 거지요. 공부 잘하고 남 괴롭히는 아이보다, 공부는 못하지만 착하고 남 위할 줄 아는 재현이가 더 귀하지요."
내가 그런 말을 덧붙이자, 재현이 엄마는 아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우리 재현이 칭찬 해 주시는 분은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고맙습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내 말이 그런 것처럼 느껴졌는지, 재현이 엄마는 연신 고개를 꾸벅인다.

"초등학교 이 학년 때 아이 아빠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제가 혼자 길렀습니다. 먹고사느라 바빠서, 철 들고부터 재현이는 늘 혼자 있어야 했지요."
재현이 엄마가 울음기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연다. 이제 재현이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싶어 나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혼자 자라서인지 재현이는 늘 다른 아이보다 늦되었다. 어휘력도 다른 아이보다 부족했고, 제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다. 낮이면 엄마가 일터에 나가느라 빈집을 혼자 지켜야 했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여자아이처럼 소꿉장난을 하기도 하고, 인형을 가지고 놀기도 했다.

다른 집 사내아이들은 총이나 칼을 가지고 노는데, 재현이는 인형이나 소꿉놀이 장난감만 찾았다. 한 번은 일부러 기관총을 하나 사주었더니, 무섭다고 가까이 하지도 않고, 방 구석에 밀어놓았다. 아빠가 초등학교 이 학년 때 공사장에서 사고로 세상을 뜨고 나자 집에 남은 거라고는 그때까지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모아 마련한 두어 칸 짜리 집이 전부였다.

할 수 없이 재현이 엄마가 일을 시작했는데, 집안에만 있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의 집 살이 이거나 식당의 허드레 일거리가 전부였다. 그래도 먹고살자니 일을 안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아이를 학원이나 공부방에 맡길 형편도 아니어서 혼자 두었는데, 그래서인지 점점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때도 선생님이 아이가 너무 내성적이라 걱정이라는 말을 했다. 수업 시간에 발표를 시켜도 입조차 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곱셈을 시켜도, 국어 읽기를 시켜도 아는 지 모르는 지, 도대체가 묵묵부답이라고 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도 그런 성격은 변하지를 않아, 여전히 학교만 갔다 오면 집안에 틀어박혀 컴퓨터 오락에 빠져들거나 잠만 늘어지게 잘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끝에 재현이 엄마는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어제 수학 시간에 숙제를 안 해 왔다고 선생님께 엉덩이 스무 대를 맞았답니다. 그리고는 오늘 아침에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지 뭐예요. 억지로 달래 보내기는 했는데...."
재현이 엄마가 말꼬리를 흐린다.

초등학교 때야 한 선생님이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니, 사정 이야기를 하면 그냥 넘어 갔을 테지만, 중학교는 선생님들이 시간마다 바뀌니 재현이 사정을 알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내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더하기 빼기도 못하는 아이가 수학 인수분해를 할 수가 없지요. 뭐 공부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애전에 접어 버렸고요, 그저 애가 탈없이 중학교라도 졸업하면 좋겠어요. 그런데 저렇게 매가 무서워 학교 가기를 싫어하게 되면 졸업장도 딸 수 없을까봐 제 마음만 태우고 있습니다. 애가 매를 워낙 무서워하거든요. 아빠가 없어서 한 번도 매를 맞아 본 적이 없는 아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구요. 그래서 말씀인데요, 선생님께서 수고스럽겠지만, 선생님들께 재훈이 사정을 좀 말씀해 주시고, 다른 벌을 주더라도 매만은 좀 피해주십사 부탁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재현이의 둥글넙적한 얼굴과 어눌한 말투를 떠올린다. 제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결코 다른 친구에게 해꼬지를 할 아이도 아니다. 아빠가 안 계신 마음의 상처가 옹이가 되어 그런 성격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리라.

"예. 제가 다른 선생님들께 재현이의 그런 사정 얘기를 해보죠."
나의 선선한 대답에 비로소 재현이 엄마의 얼굴이 펴진다.

"사실 학교에 찾아오는 것도 무척 망설였답니다. 남들은 모두 자기 자식이 잘 해서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찾아가는데, 저는 자식놈 사정이나 하려고 찾아오니 발걸음이 천근만근일 밖에요. 찾아오면서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나도 남들처럼 내 자식이 똑똑하고 잘 해서 자랑스럽게 학교에 가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초등학교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그저 구구한 부탁이나 하려고 오는 제 신세가 한스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 아이가 제게는 유일한 혈육인 걸요. 선생님, 이런 어미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제발 중학교 졸업이라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말끝에 재현이 엄마는 또 눈물을 글썽인다.

공부가 전부인 학교, 성적의 우열로 인간을 평가하는 학교 속에서 재현이는 어쩌면 영원한 낙오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성적이 아이의 전부는 아니라고, 재현이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 아이가 이 세상에는 더 보물같은 존재라고, 그런 아이들이 나중에 이 세상에서 올곧고 바람직한 사람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는 위로의 말로 재현이 엄마의 마음을 안심시켜 돌려보낸다.

그러나 그날, 나의 마음은 낮게 가라앉은 하늘보다 더 침침했다. 정말 그런 세상이 오기는 올까? 아이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지 않고, 저마다 지닌 개성과 따뜻한 마음씨로 평가해 주는 사회, 더불어 함께 꿈을 일구어가는 그런 사회가 내가 위로한 말처럼 오기는 올 것인가? 혹시 내가 한 말이 잠시의 평안을 위한 진통제 같은 것이나 아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왜일까? 자꾸 내 눈앞에 쳐진 어깨로 돌아가는 재현이 어머니의 뒷모습과, 더듬거리는 말투의 둥글넙적한 재현이 얼굴이 운동장 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버즘나무 가지처럼 일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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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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