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나요? 내 마음 속 깊은 이야기들

<시와 아이들> '봄 수업시간'에 쓴 아이들의 봄 편지

등록 2002.04.10 22:47수정 2002.04.1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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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에게 상추쌈을 건네는 유정이 ⓒ 안준철
봄 수업을 했습니다. 해마다 가을수업을 해왔는데 올해는 3학년 졸업반을 담임 맡게 되어 2학기가 되면 이미 취업을 나가고 없을 아이들을 생각하여 가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봄 수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학기초 학교의 강경한 생활지도의 서슬에 눌려 언제 봄이 왔다가 가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잠자고 있는 감성을 한번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도 작용하였습니다.

"봄, 봄입니다. 여러분은 봄을 보셨습니까?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이 따사로운 햇살의 감촉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바로 지금 봄을 느껴보세요. 여기 이 하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면서, 그리고 봄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러분의 꿈 이야기를 써도 좋고, 여러분 가슴에 맺혀 있는 슬픈 이야기를 쏟아놓으셔도 좋습니다. 낙서하듯이 자유롭게, 하지만 조금은 진지하게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해주면서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한참 시간이 지날 때까지 멀뚱멀뚱하고 있다가 제가 빙그레 웃으며 눈짓을 하면 짜증난다는 듯이 고개를 푹 파묻어 버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도 10분이 채 못되어 제 맘을 다스리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합니다. 오래 전 가을 수업을 할 때도 그랬습니다. 차분히 글을 쓴다든지, 사색에 잠긴다든지 하는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이들이 하얀 종이에 가득 메워 적어낸 글을 읽어보면 교사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생각이 없는 아이라고 나도 모르게 단정을 해버린 한 아이의 글입니다.

"선생님, 저는 이런 시간이 좋아요. 저는 까불고 나쁜 짓을 한 아이지만 이런 시간을 좋아해요. 조용히 앉아서 나 자신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물어요. 그러면 마음 한 구석에는 허전함과 실패감이 맴돌고 있어요. 학기초에는 방황을 많이 했어요.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 미웠어요. 그래서 술도 먹어보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저번에 선생님이 이러셨죠.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 집으로 전화해라"하셨죠. 그 한 마디가 제게 얼마나 희망과 용기가 되었는지 몰라요. 지금 되돌아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았지만 나쁜 일은 모두 제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어요. 지금도 나의 마음속에 나쁜 싹들이 자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 싹을 다듬고 골라서 좋은 싹으로 만들려고 해요. 선생님 저를 잘 지켜봐 주세요. 저는 지금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어요."



▲봄 수업시간에 쓴 봄 편지들... ⓒ 안준철
이 글을 동료 선생님들에게 보여드리면서 '아이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죄'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그 아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해서 그 아이의 행동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의 내부에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즐겁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런 시간을 갖고 난 뒤 아이들과 복도에서라도 마주치면 저는 이런 난데없는 인사말을 던지곤 합니다.


"너 잘 있니? 너에게 안부 전해 줘."
인사를 받은 아이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저를 말똥히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면 저는 손가락으로 아이의 가슴팍을 가리키면서 몇 자를 더 붙여서 다시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네 안의 너 잘 있니? 네 안의 너에게 안부 전해 줘."

계절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사색할 시간을 주고 무언가를 써보게 함으로써 그들 내부에 깊이 감추어진 '자기'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계절 수업의 목적이지만, 봄 수업의 경우는 학기초 아이들의 성향이나 마음의 상태를 읽기 위한 집단상담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쓰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혼한 가정에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한 아이의 글입니다.

"엄마!! '엄마'라는 말만 들으면 눈물이 나... 항상 엄마가 가엾기만 해. 엄만 내가 불쌍하다고 그러지? 해주고 싶은 것도 못해준다고... 날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니까 아빠한테 가라고... 나 그 말 듣고 얼마나 충격 먹었는지 알어? 나 언제나 엄마 옆에 절대 딴 곳으로 가지 않는 전봇대가 될래...정말이야.

엄마는 내가 언젠가는 아빠한테로 갈 꺼라고 그러지만 엄마 딸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아. 그러니까 엄마 제발 아프지 마. 엄마는 맨날 신경 쓰고 걱정하니까 병이 생기는 거야. 글구...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난 엄마가 그냥 조금 아픈 줄 알았는데 쓰러질 때 알았어. 바보냐? 내가 남도 아닌데 오빠랑만 알고 있고...

내가 엄마 쓰러졌단 말 들었을 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뛰었어. 내가 일부러 엄마 볼까 봐 몰래 몰래 울고...집에 가서도 엄마 자다가 안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엄마 숨쉬는지 확인하고...정말 남들은 안 그러는데 왜 나만 불안해서 떨고 있어야 하는지 나 많이 서러워서 하루 종일 운 적도 있어.

우리 맨날 하는 말 있잖아.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언젠가는 우리 가족 행복할 날이 있을 거라고. 난 그 말 믿고 있어. 그니까 우리 인제 울지 말고 열심히 사는 거야 그치?? 엄마한테 미안한 게 있는데...사실은 엄마 몰래 아빠 만나고 있어. 아빠도 나름대로 우리 얼굴 제대로 못 보니까 많이 가슴 아파하고 힘들어 해. 그럴 때마다 가운데 있는 나 정말 정말 화가 나고 속상해.

가끔 내 화를 못 이겨서 죽고 싶을 때가 많았어. 그때마다 우리 가족 엄마 오빠 아빠를 떠올리면서 나중에 나중에 우리 행복한 모습을 생각하면 다시 힘이나...엄마 딸도 이렇게 힘내고 학교 잘 다니잖아. 그니까 엄마도 힘내고 울지 말고 아프지 말고...엄마만 건강하면 나 소원이 없겠어...이제 우리 잘 하는 거야. 알았지? 파이팅이다. 엄마 한 번도 이런 말 해주지 않았는데.. 사랑해..."


이런 속 깊은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 아이도 겉보기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일탈행동을 일삼는 아이일 뿐입니다. 그 아이의 감추어진 빙산의 뿌리를 더듬어 찾아내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 아이들 판단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이들을 한 묶음으로 대상화해서 '관리'하는 교사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성실한 관리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의 묘약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교사에게 자신의 아픈 환부를 드러내는 아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봄 편지 같은 아이들의 푸짐한 삼결살 파티 ⓒ 안준철

이번 봄 수업으로 인해 저와 아주 가까워진 아이가 또 한 명 있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쓴 글을 읽으면서 교사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교사의 일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다음은 그 아이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며칠 전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자의식이 강한 아이라고 한 말은 듣기가 싫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건방지고 내 뜻대로만 하려는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라 내 주장과 내 생각이 있는 자의식이 강한 아이다. 그 동안 솔직히 너무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나를 나쁘게만 보시는 선생님들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

봄 수업은 오래 전에 쓴 '풀잎과 거미줄'이란 제목의 자작시 한 편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아이들의 잠들어 있는 감성이 어서 눈뜨기를 빌면서. 그리고 나의 높이에 대한 갈망보다는 남을 눈부시게 하는 삶을 꿈꾸는 아이들이 많아지길 기대하면서.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는 풀잎이 되고 싶다
흔하디 흔한 빗방울도
반짝이는 보석이 되게 하는
나는 눈부시지 않아도
너를 눈부시게 하고
나는 반짝이지 않아도
너를 반짝이게 해주는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나는 거미줄이 되고 싶다
어두운 풀숲 그늘 속에도
반짝이는 것들이 있다고 말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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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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