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 인생의 엄격함과 부드러움

녹색 노년 인터뷰(1) : 고 임성남 국립발레단 이사장

등록 2002.05.27 11:14수정 2002.05.2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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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부고란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부터였을까. 일상의 작은 습관같은 것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러나 오늘 신문에서 본 '임성남 국립발레단 이사장'이라는 굵은 글씨와 사진은 10여년 전의 시간 속으로 나를 끌고 간다.

기독교방송 라디오에서 아나운서로 노인 대상 프로그램인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를 진행하던 때였는데, 인생은 60부터라는 인터뷰 코너가 있었다. 그 때 국립발레단 단장이셨던 임성남 선생을 모시고 방송한 것을 그대로 글로 풀어 놓은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서 우리 나라에 '발레'라는 낯선 장르를 뿌리내리게 한 그 분을 기억해 본다.


1990년 1월 16일. 오전 11시 생방송을 앞둔 시간. 전 날 확인까지 한 출연자가 방송 시간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 그 심정은 정말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당황과 낙담, 속상함. 그래도 앞서는 것은 어떤 것으로든 그 시간 진행을 해야 한다는 다급함. 최후의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못하고 복도를 힐끗거리며 생방송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시작하는 인사를 끝내고 첫 노래가 나가는데 환해진 PD의 얼굴이 보인다.

미리 왔는데 좁은데다 차를 세우느라 시간을 다 썼다는 말씀과 함께 어디서나 뵐 수 있는 50대 아저씨 같은 평범하면서도 둥글둥글한 모습, 거기다가 따뜻한 웃음이 퍼지는 부리부리한 눈이 한 눈에 확 들어왔다.

- 처음 무용 시작하실 때 얘기 좀 들려주세요.
"작년이 꼭 45년 됐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햇수로는 작년에 꼭 45년을 넘겼습니다. 아주 오래 전 얘기지만 원래 저는 무용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피아니스트나 작곡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이런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 실제로 피아노를 했어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께서 굉장히 완고하고 엄하셔서 결국 피아노를 중단하고 말았죠. 그 후에 우연히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것이 유명한 불란서 영화 '백조의 죽음'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본 발레 영화였는데 굉장한 충동과 감격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발레가 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실제 발레를 하게 됐어요. 영화를 통해서 발레를 하게 된 것이죠."

- 그 때 보신 영화 '백조의 죽음'의 어떤 것이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요?
(굳이 '충동'과 '충격'의 차이를 따지지 않는다 해도, 인생의 3분의 2가 넘는 45년 동안 발레만 해오신 분이 말씀하신 '충동'이라는 표현이 나의 '충격'이라는 표현보다 얼마나 더 적확하고 느낌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지 '충격'이라는 말을 하는 바로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말은 마이크를 빠져나가 공중으로 흩어졌고 선생님의 대답은 시작되었다.)

"그 때는 그냥 '사람의 육체, 몸을 통해서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세상에 있었던가'하는 아주 단순한 느낌이었는데, 결국은 '사람의 몸이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구나'하는 매력이랄까 감동을 느껴서 이렇게 지금까지 무대에 서게 됐습니다. 피아노는 집에서 했지만 발레는 밖에 나가서 아버지가 안보실 때 안보이는 곳에서 했으니까 아버지를 속일 수 있었죠. 사범학교를 나오고 나서 바로 당시에 있었던 '서울발레단'에서 6개월 동안 공부도 하고 공연도 했어요. 그러다가 1950년 6·25가 나던 해에, 아주 어려운 시기였는데도 숙명이었던지 일본에 갈 수 있었고 일본에 가서 본격적으로 발레 수업을 한 셈입니다. 일본에서 한 6년 발레를 하고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6·25 때 벌써 납치되셨고, 그래서 제가 무대에 선 모습을 보지 못하신 것은 물론이고 다시 만나뵐 수도 없게 돼 버렸죠."


- 요즘은 남자 무용수가 많아졌지만, 선생님께서 시작하실 때만 해도 집안의 반대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남자와 무용 하면 좀 어색해 했지요?
"일본에서 돌아온 것이 벌써 40년쯤 됐는데 그 때 처음으로 귀국 공연을 할 때였어요. 제가 왕자의 모습으로 무대에 서있는데도 막이 올라가니까 관객들이 무대 위의 제 모습을 보고 깔깔대고 막 웃던 그런 시절이었지요. 무대 위에 서있으면서도 참 어이가 없었어요. 사실 그 무렵만 해도 남자 무용수는 정말 다섯 손가락을 헤아릴 정도였으니까요. 이제는 대학의 무용과에도 그렇고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발레를 하는 남학생들이 많이 늘어났고 인식도 많이 달라졌죠."

- 한 줄의 글이나 한 마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용에 담는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발레는 한국 무용이나 다른 무용하고는 다릅니다. 무용수들이 어렸을 때부터 매일 몇 시간씩 엄한 훈련을 계속해야 되는데, 그러다보면 발끝으로 서야 하는 여자 무용수들의 발에서는 피도 나고 아프고 발톱도 상당히 많이 빠집니다. 여간한 정신력과 의지가 아니면 그런 수련을 계속하지 못하지요. 자기 심신의 단련에다가 어려움을 극복하는 정신력으로 스스로를 가다듬는 과정을 거쳐야만 훌륭한 무용수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발레는 종교와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신력을 가다듬는 문제도 그렇고 육체적인 고통을 겪어가는 것도 그렇고, 항상 그런 생각으로 후배를 지도하고 또 저 자신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발레란 것이 엄격함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완성시켜 가는 분야이기 때문에 저는 연습장 안에서는 굉장히 엄격합니다. 그렇지만 하루 몇 시간씩의 연습을 마치고 일단 연습장을 떠나면 저도 보통 사람이죠.(웃음)"


- 서구에서 태어난 발레라는 형식에다가 우리 것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이 큰 과제일 것 같습니다.
"클래식 발레가 갖는 전통 기법과 표현을 일단 자기 것으로 만든 후에는 우리들의 민족적인 바탕 그러니까 우리 고유의 정신, 정서를 담은 발레를 창조해서 결국은 세계 무대에 진출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죽 해왔습니다. 그래서 '춘향전'이라든가 '배비장', '왕자 호동' 이야기들을 가지고 한국적인 창작 발레로 작품화해 왔지요. 앞으로도 현대를 사는 예술가로서 우리 나라 발레를 정립할 때까지 사명감을 가지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 혹시 '발레를 그만 두고 싶다' 하신 적은 없으셨어요?
"일본에서 고생하면서 공부할 때였는데 '이렇게 어려운 발레를 해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었을 때의 우려가 지금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 걸 느낍니다.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돈하고는 거리가 멀죠. '과연 내가 예술가가 돼서 장차 풍족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가난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그런 예술가로 끝날까' 이런 갈등 때문에 한 번은 발레를 포기했습니다. 다른 직업을 가져보려고 영어 공부에도 몰두해 봤지만 그것은 한 때의 착각이었고 마음은 다시 발레에 되돌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런 의미에서 절대로 후회는 안합니다."

- 아버님의 길을 따르는 자녀가 있습니까? 아버님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한다거나 하면 참 아름다울 텐데요.
"1남 3녀 중에 한 사람 정도는 대를 이어주었으면 했는데, 뭔가 잘못 된 것 같아요. 음악하는 딸은 있는데 무용이나 발레하는 아이가 없어서 섭섭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서 외손자 하나, 손녀 하나, 저도 이제 말 그대로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이 때부터는 웃음이 말씀보다 앞서서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까지도 저절로 훈훈해지고, 세 살짜리 손자를 앞에 두고 파안대소하시는 모습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외손자가 지금 세 살인데 음악성이 굉장히 좋고 사내 아이면서도 음악이 들리면 그냥 막 자유롭게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혹시 무용을 하지 않을까,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웃음)"

- 앞으로 꿈이 있으시다면요?
"역시 제 직업상의 얘긴데요, 우리 나라에 발레학교가 없습니다. 국립극장도 있고 다른 것도 다 조직되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발레학교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뛰어난 발레 재질, 좋은 체격 여건에도 불구하고 전문가가 많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꼭 발레학교가 생겨서 제가 그 발레학교의 간판을 걸 수 있는 때가 왔으면 하는 것이 제일 큰 꿈입니다."

부리부리한 눈에 웃음이 담길 때, 그 어디에서도 흔히 예술가 하면 연상되는 날카로움이나 특별함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주 섬세하게 느껴지는 손이었다. 약간 붉은 기운을 띤 채 가늘고 곧게 뻗은 손가락은 헤어지기 전 악수를 나눌 때 전해오던 온기와 함께 부드러움으로 기억된다.

웃음과 함께 그 앞에서는 거짓이나 입바른 소리로 꾸밀 수 없을 것 같던 직선적인 눈빛이 담겨 있는 부리부리하고 큰 눈. 60년 동안 쌓아온 아름다움을 향한 사랑이 녹아 스며있는 듯한 부드럽고 따뜻한 손. 어렵고 힘든 무용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아닐까. 엄격함과 부드러움.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닐지.

이후 1996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이 문을 열었다. 발레학교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시던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그리고 그 때 세 살이었던 외손자는 지금 무용을 마음에 두고 있을까. 발레 외길 인생을 마치고 훌훌 먼 길을 떠나신 선생님께는 이 또한 남은 사람의 부질없는 생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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