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만년필로 써서 보낸 편지

사랑하는 지인, 현미·은진·찬숙·진옥·경임·혜영에게

등록 2002.07.28 14:14수정 2002.07.3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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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잊고 있었구나, 불과 몇 년전만 해도 자판을 두드리지 않고 종이에 만년필로 글을 써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하얀 봉투에 주소를 적고 행여 잘못된 것은 없나 한 번 더 편지를 꺼내어 살펴본 뒤에, 풀로 봉투를 봉하여, 동네 어귀에 있는 빨간 우체통까지 달려가 편지를 집어넣곤 했었던 그 기억을.

너희들 취업 나가면 얼굴 못 보는 대신 매일 같이 전자우편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리라 약속도 하고 다짐도 했는데. 세상에 숙소에 컴퓨터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참, 은진이 엄마가 그러시더라. 방에 컴퓨터도 없고 일반 전화도 없으니 주거 환경이 형편없지 싶었는데, 그래도 방도 꽤 넓고 일도 편하다고 한다고, 다행이라고, 어린 것이 벌써 철이 들어 부모 걱정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그랬을 거라고.

오랜만에 만년필로 써보는 편지가 참 색다르구나.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참 인간이란 것이 간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십 년 된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정말 사오 년밖에는 되지 않은 일들이 까마득한 옛날 일로 기억되니 말이다. 편지를 우체통에 집어넣고 답장이 올 때까지 몇 날을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곤 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인데….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지난 과거의 것들을 너무 빨리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는 집에서 책만 보고 있기가 무료해서 산책 삼아 7월 땡볕 속을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걸어보았단다. 한 십리 거리쯤 될까? 한참을 걷다 보니 산을 깎아 만든 큰 길 위에 서 있게 되었지.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적한 시골 풍경들이 참 삼삼하더라. 한참 자라고 있는 푸른 모들이 바람결을 따라 너울너울 춤을 추는 모습이 그중 으뜸이었어.

한참 후에 그 길을 다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저런 아름다운 풍경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벼들은 지금 흔들리면서 더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 거라고. 사춘기를 지나 더 큰 세상의 바람 속으로 뛰어 들어가 지금쯤 흔들리면서도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 너희들처럼 말이지. 맞니?

이런 생각도 해보았단다. '지금 아파하는 자만이 춤을 출 자유가 있다'고 말이야. 이 말은 좀 어렵니? 너희들이 그때 그 장소에 함께 있었다면 설명하기가 훨씬 더 쉬울 텐데. 참, 그러고 보니 너희들이 여자니까 엄마들이 아기를 낳을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법도 하다. 그럼 3분 시간적인 여유를 주겠다. (…) 답이 나왔니? 물론 정답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겠지만.


처음엔 나도 푸른 벼들이 펼치는 외형의 아름다움에 더 많이 정신이 팔려 그런 생각을 미처 못했단다. 대개는 그렇단다. 진짜는 감추어져 있는 법이지. 그래서 배우고 생각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건 그렇고, 자연 속에 있는 모든 생명은 성장의 아픔을 겪기 마련이란다. 그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지. 죽은 것들은 이미 감각이 없으니까. 문제는 그 아픔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춤추는 푸른 벼들처럼.

만약 벼들이 한 여름의 땡볕을 피해 어디 시원한 그늘로 가서 쉬고 있다고 가정해봐. 그런 일이 생길 리는 없지만 문학적 상상력으로 말이야. 그런 상상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되거든. 그럼 과연 어떻게 될까? 벼들이 자주 그런 꾀를 판다면 자연히 뿌리가 견고해지지 않겠지. 그런 연약한 뿌리로는 바람에 한 번 스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테고. 그럼 푸른 물결 같은 아름다운 춤을 출 자유가 없는 거지. 지금 아파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벼들은 말이야.

너희들의 고생이 때로는 마음 아프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란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들은 행복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아주 오래된 말도 문득 떠오르는구나.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는 말도 있지. 너희들 이제 곧 학교를 졸업하면 성인이 될 터인데 그 전에 돈의 참된 가치를 아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 무엇보다도 너희들이 노동 현장에서 삶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나로서는 안심이 된단다. 땀의 대가만큼만 돈을 받는 정직한 곳이 바로 그곳이니까.


오늘은 여기서 줄이마. 이제 우체국엘 다녀와야겠구나. 동네 어귀에 빨간 우체통이 있지만 운동 삼아 좀 걸어갔다가 올 생각이야. 하지만 빠른 우편보다는 그냥 우편으로 부칠 거야. 오래 기다리면 그만큼 그리움이 더 커질 테니까. 그래, 모든 것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벼도 때가 되어야 익는 법이니까. 그건 그래도 너희들 어서 보고 싶구나. 꾹 참으마. 너희들 뿌리가 더 튼실해질 때까지.
모두 건강하길 빈다. 안녕!

2002년 7월 28일
사랑하는 담임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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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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