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사랑과 성, 같이 이야기하자

영화 속의 노년(39) - <죽어도 좋아>

등록 2002.08.01 18:50수정 2002.08.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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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흥분으로 들뜬 다른 시사회장과는 달랐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분류 소위원회의 제한상영가 등급 부여로 어딘지 긴장되고 약간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는데, 곧바로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고 그 웃음은 자주 반복되었다.

자기들만의 사랑과 성(性)을 나누고 꾸려나가는 노인들의 모습이 유치해서였을까, 황당해서였을까, 천진난만해서였을까, 어이없어서였을까, 재미있어서였을까.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린 73세 할아버지와 72세 할머니. 우리에게 노인은 늘 무성(無性)의 존재이다. 그래서 노인들이 살림을 차리는 것은 그저 외로움이나 좀 덜고 서로 수발하면서 마지막을 의지하려는 정도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화면 속에서 두 사람은 첫날부터 열심히 몸을 나눈다.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어깨와 휘어진 다리. 할머니의 늘어진 젖가슴과 두리두리한 허리, 아이 낳은 흔적이 그대로 남은 트고 갈라진 배. 그래도 두 사람의 입맞춤은 쪽쪽 소리가 나게 달콤하고 몸은 서로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다.

힘이 들어 "아이고, 나 죽겄네"를 연발하지만 두 사람은 솔직하게 상대의 욕구에 다가가고, 그래서 억지로라든가 내 마음대로는 없다. 상대를 배려하며 끊임없이 소통하고 서로를 나눌 뿐이다.

격렬함과 뜨거움보다는 메마른 그들의 피부처럼 서걱대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그들만의 진실로 서로를 보듬어 안는다. 성교에 몰입해 안간힘과 정성을 쏟는 그들의 늙은 몸은 그래서 보는 사람을 진지하게 만들고 때로 슬프게 만든다.

근사한 욕조의 거품 목욕은 아니지만 고무 다라이(다른 어떤 말도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에 들어앉아 서로 씻겨주고 물장난을 치는 그 순간, 그들은 나이듦과 늙어감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할머니의 오랜 외출로 마음 상한 할아버지. 홀로 기다리며 누운 방은 너무 쓸쓸하고 할아버지의 마른 몸은 외로움으로 점점 더 작아진다. 큰 소리로 싸우는 두 사람.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도 이웃도 끼어 있지 않기에 사랑은 더 더욱 절실하고 애가 탄다.

몸살로 앓아누운 할머니에게 약을 사다 먹이고, 직접 닭을 잡아 상을 차려 내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맙고 미안하다며 울고 만다. 그걸 보면서 나는 왜 울었을까. 마음을 나누고 몸을 나누지만 남은 날이 많지 않은 노년의 사랑은 너무 짧아 안타깝고 애틋해 슬프다.


할아버지는 밤이고 낮이고 잠자리를 갖고 나면 꼭 달력에 표시를 한다. 떨리는 손으로 달력에 표시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무엇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의 생에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사랑과 열정을 남겨두고 싶었을까. 아니 오히려 그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내보이는 존재 증명이 아니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의 성교는 야하지도 않고, 음란하지도 않고, 선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절박하고 쓸쓸해 노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왜 성인인 내가 이 영화를 자유롭게 보지 못하게 하는가. 식사 후에 틀니를 빼서 정성껏 닦는 것처럼 그들의 성(性)은 한없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데, 여기 우리들 삶은 지나친 우려와 쓸데 없는 제한으로 진실에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한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노인 영화로 보여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했다던가. 그저 러브 스토리로 보길 원한다고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이 영화는 노년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뛰어난 노인 영화이다. 물론 러브 스토리이다. 늘 젊음으로 남아 있을 것같은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 앞에 기다리고 있는 피할 수 없는 노년의 삶과 사랑을 그린 절절한 러브 스토리이다.

제발 고령화 사회니, 노년의 삶의 질이니 말로만 외치지 말고, 이런 영화가 고맙게도 우리 앞에 왔을 때 영화 속 노인의 사랑과 성(性)을 자유롭게 보고 함께 이야기해보자. 우리들 노년을, 그리고 우리들 사랑을. 영상물등급위원회여, 제발 부탁이다.

(<죽어도 좋아> Too Young to Die / 감독 박진표 / 출연 박치규, 이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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