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머니의 젖가슴...

<책 속의 노년-35> <트루스의 젖가슴>

등록 2002.08.27 20:09수정 2002.09.0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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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공연을 위해 세 여자가 모인다. 서른 넷의 연출가 이실, 네 살 위인 제작자 예국희, 쉰둘의 여배우 오데레사. 연극 제목은 <트루스의 젖가슴>, 실존 인물인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 진리를 전하고 다니는 사람)'의 자서전을 엮은 모노드라마이다.

이실은 속옷 대리점을 하는 언니와 엄마에게서 다달이 생활비를 타 쓰며, 자신이 연극하는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못난 사람이 아닌가 싶은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 연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극단 '가이아'를 이끌고 있는 제작자 예국희는 극단 살림을 꾸려가느라 헉헉대고 있고, 여러 번의 자연유산에 이은 불감증을 겪고 있다.


한편 라디오 방송에 성우로 출연하며 혼자 살고 있는 왕년의 명배우 오데레사는 딸을 두고 집을 나온 지 17년, 그후 이혼했고 이제 그 딸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딸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훌륭한 연극을 하고 있는 엄마의 우뚝 선 모습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연극은 연습 시작부터 매끄럽지 못하다.

연극 <트루스의 젖가슴>은 노예로 태어난 여자아이 이사벨라가, 고통 속에서 얻은 강인한 힘과 신과의 영적 교감을 통해 흑인 해방운동사에 소저너 트루스라는 뛰어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저너 트루스는 1850년대 말의 한 순회 집회에서 웃옷의 단추를 풀고 모여 있는 청중들에게 자신의 젖가슴을 보여준다. 그녀가 여자가 아닐 거라는 악선전을 퍼뜨리는 반대자들의 입을 몸으로 명쾌하게 막아 버린 것이다.

연극 연습을 해나가면서 연출자 이실과 배우 오데레사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다가 끝내 오데레사는 작가의 주장이나 생각을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과격한 장면이고 사족이라며 젖가슴 장면이 나오는 연극의 마지막 부분을 들어내자고 주장하고, 그 부분을 연극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이실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며 반발한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데레사와 이실이 확실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부분은 연극적인 장치로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오데레사가 젖가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이유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연습을 위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지만 삼십대와 오십대 여자 둘이 마주 보고 있는 자리는 참으로 멀기만 하다. 과거의 명성을 껴안은 채 자신의 틀을 고수하려는 오데레사, 젊음의 고뇌와 진정성을 품고 있긴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는 이실.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온전히 내보이고 활짝 열어버림으로써 서로에게 특별하고 가까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설사 트루스에게 젖가슴이 없었다 해도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바로 생명을 품고 먹여 살리는 젖가슴이었던 것이다. 할머니, 어머니, 딸로 이어지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곳은 역시 젖가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로 남은 젖가슴을 안고 나머지 생을 살아가야 하는 쉰둘의 오데레사. 엄마도 아버지도 없이 결혼하는 딸에게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는 모습밖에는 줄 것이 없다 해도 그녀는 행복하리라. 그 딸 역시 아이를 품어 세상에 내놓고 젖을 물릴 때 비로소 그 어미를 기억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기에. 거기다가 이실도 이미 오데레사의 딸이기에.

이렇게 우리 여자들의 생은 젖가슴에서 젖가슴으로 이어지는구나…. 이제 막 몽우리가 잡히기 시작하는 딸아이의 가슴이 그리도 예쁜 것은 새싹이 딱딱한 땅을 뚫고 뾰족하게 얼굴을 내미는 것 같은 생명의 숨결이 손에 잡히기 때문이리라.

덧붙이는 글 | <트루스의 젖가슴>, 전혜성 장편소설, 문이당, 2002

덧붙이는 글 <트루스의 젖가슴>, 전혜성 장편소설, 문이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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