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요즘 가을 탈 시간 없어요"

가을을 타지 않는 아이들

등록 2002.09.12 04:41수정 2002.09.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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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찬 기운에 나뭇잎처럼 몸을 뒤척이다가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벽 산을 다녀온 뒤였습니다. 제 방에서 아침 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아이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너 요즘 가을 타니?"

아들아이가 가을을 타고 있다는 어떤 단서를 잡고서 물음을 던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유에서 던져본 질문입니다. 그런 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들아이는 잠깐 뻥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더니, 이내 짧은 한숨이 섞인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저, 요즘 가을 탈 시간 없어요."

그런 아들에게 저도 이렇게 쉽게 말을 해버립니다 .
"하긴, 가을을 타도 시험이나 끝나고 타야겠구나."
하지만 시험이 끝난다고 과연 가을을 탈 여유가 있을까? 아니, 가을을 타도록 널 내버려둘까?

저는 이런 우울한 생각을 떨치며 아들 방을 나와 주방에서 갈치를 손질하고 있는 아내에게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내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물음에 값할 만한 어떤 애틋한 흔적이 아내에게서 발견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지금 아내가 인생의 가을 들녘(아니 벌써?)을 지나고 있다는 점에서 아들과의 어떤 차별성을 기대해볼 뿐이었습니다.
"당신, 요즘 가을 타?"

아내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빠르게 나타났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아내는 처녀시절 나를 호리던 황홀한 눈빛을 다시금 선보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어머, 이거 봐요. 갈치 뱃속에 조기새끼가 들었어요."
아내의 동문서답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의 손에는 갈치 내장 속에 들어 있다가 금방 나온 작은 조기새끼 한 마리가 들려 있습니다.


그 조기새끼를 보고 있노라니 더 이상 아내에게 가을을 타는지 어쩌는지 물어볼 마음이 일지 않았습니다.

아침상에 제 몫으로 갈치 두 토막과 그 문제의 조기새끼가 올라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인심 쓰는 체하고 아들에게 넘기려 했지만 착한 아들은 한사코 사양하기를 거듭하여 끝내 다시 내 차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먹어치우고 비루먹을 개꼴이 되어 학교로 향해야 했는데, 첫 수업 시간부터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기 가을 타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요."
그러자 한 녀석이 손을 번쩍 들더니 몸을 비비꼬면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가을남자 아닙니까? 가을만 되면 옆구리가 시리고…."
또 몇 녀석의 눈에 장난기가 어리더니, 그 중 한 아이가 이렇게 농을 해댑니다.
"저는 가을 안 타고 버스 타고 학교에 오는데요."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서 아이들에게 사정하다시피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여러분, 농담하지 말고 진짜로 대답해봐요. 정말 가을 타는 사람 없어요? 가을이 오면 마음이 찡해오는 그런 사람 없어요? 슬픔인지 행복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을 강하게 느껴본 사람 없어요? 가을만 되면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허전해지고, 내가 누구인지 허공에 대고 물어보고 싶은 그런 기분 경험해본 사람 없어요?"

말을 하다보니 그랬는지, 저는 목소리가 조금씩 격해지면서 숨이 가빠오고, 눈에서는 물기마저 느껴졌습니다. 아이들도 그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아무도 손을 드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들의 표정도 가지가지.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시험범위나 알려주지 웬 썰렁한 가을 타령이냐고 시큰둥해 있는 아이가 몇 있는가 하면, 손을 들어주고 싶은데 가을을 타지 않아서, 가을을 탄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서 손을 들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고마운 아이도 더러 눈에 띠었습니다.

평소에도 말을 씀벅씀벅 잘하는 한 아이가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고 내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가을을 타는 게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그 질문에 선뜻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사이, 창 쪽에서 또 한 아이가 손을 드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무슨 질문이든지 하고 싶으면 하라는 뜻으로 '응?'하고 신호를 보냈는데, 그 아이는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저, 저 가을 타는데요."
"그, 그래? 어떻게 가을을 타는데?"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입니다. 그렇게 반사적으로 말을 던져놓고 난 뒤, 저는 조금의 여유를 갖고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아이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숨만 폭폭 내쉴 뿐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결심을 했는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저 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뭔데? 말해 봐."
"저 지금 교실을 나가고 싶습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합니다. 선생님 잠깐만이라도 좋습니다. 뒷동산에 올라가 낙엽을 밟다가 들어오겠습니다."

교실은 다시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웃음의 질과 강도를 가늠하면서, 그 아이에게 당하고 만 것인지, 아니면 정말 가을 타는 아이를 만난 것인지, 정신을 모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라앉자 제 입에서는 이렇게 짧은 한 마디가 떨어집니다.
"좋아."

그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아내는 제가 그 아이에게 당한 쪽으로 결론을 짓는 눈치였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 기분이 좋았어. 요즘에도 그런 돈키호테 같은 녀석이 있다니 말이야."

아내는 제 말에 짧은 웃음으로 화답하더니 시계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들아이를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마침 그때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느 때 같으면 요란을 떨었을 초인종 소리가 딱 한 번 울리고 만 것입니다. 그 여운이 참 묘했습니다.
"애가 맞아요?"

아내도 그게 이상했는지 문을 열려다 말고 내게 동의를 구합니다. 그런데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떤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는지, 제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녀석이 가을 타나 보지. 어서 문 열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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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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