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에 풀을 깎아줘

20여기 봉분 중에 오직 하나만 머리 가득 풀을 담고 있다. 왜?

등록 2002.09.14 13:02수정 2002.09.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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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잘 다듬어진 다른 무덤에 비하면 이 무덤의 초라한 행색은 길가는 나그네를 멈추게 한다.

잘 다듬어진 다른 무덤에 비하면 이 무덤의 초라한 행색은 길가는 나그네를 멈추게 한다. ⓒ 황종원

어딘가 이상하다. 걸음을 멈추었다. 매일 다니는 길, 며칠 전에 제초기를 들고 여섯 사람이 주위를 쓸고 갔던 곳이다. 20여기 중에서 가장 큰 봉분은 때없이 사람들이 와서 떼를 다듬곤 하기도 하였다.


부부인 듯한 내외 중 남편이 부인에게 한 마디를 하는 말 소리에 이끌려 내가 걸음을 멈추기도 하였다.
"제초기로 서너 번 대기만 하여도 될 텐데. 저기만 그냥 두었지."
그 말을 들으니 그 마음이 내 마음이었다.

동네 산은 사유지였다. 길의 시작에서 끝까지 20여분 거리였다. 오르막에서 길은 시작되었다가 기슭으로 가면 봉분이 무더기로 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대까지 집안 어른을 모시는 선산인 듯하였다. 산의 옆에 나란히 있는 아파트 단지의 1,2층 높이에 무덤들이 오손 도손 있다.

걷다 보면 스치고 지나쳤던 숲 속의 봉분까지 단정한 맵시로 다듬어졌다. 그런데 시야가 터지고 가장 너른 장소에 있는 그 봉분만은 초라한 모습으로 풀 바가지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 나그네의 눈으로 볼 때 예사롭지 않다.

무덤들마다 묘비는 일체 없다. 필시 가족들의 무덤이니 맨 위는 가장 윗대요 맨 아래는 가장 아랫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봉분들의 허리에 있는 저 봉분은 중간쯤 선조 어르신일 것이다. 벌초 꾼들은 필시 집안의 누군가에게 작업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작업 범위와 작업대상 봉분 등 등.

추석이 가까워졌다. 분명 후손들은 여기로 성묘를 올 것이다. 무덤 하나 하나에 조촐한 음식이 올려질 것이다. 그럴 때 유독 그 무덤에 멈추는 자취가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랴. 죽음은 선악을 묻는다. 선악이란 또 누구의 기준인가. 유독 혼자 풀을 베고 누운 무덤을 보니 가을은 더 적막하고 살아 있는 이들의 인심이 안쓰럽다.


버려진 이여. 당신을 볼 때 분명 당신의 후손들은 무엇인가 느끼겠지요. 살아서 당신이 잘못하였던, 제초 비용을 추념할 후손 하나 남기지 않고 당신이 떠났던. 매일 내가 이곳에 걸음 하니 나그네가 문득 걸음을 멈춰 하루 한 뼘씩 풀을 뜯어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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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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