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산소로 벌초 가는 길

[추석특집] 벌초하러 가는 날엔 어김없이 내리는 비

등록 2002.09.17 08:54수정 2002.09.1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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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벌초하는 모습

벌초하는 모습 ⓒ 이종찬

설마 설마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난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비가 왔다. 해마다 추석을 앞두고 우리 형제들이 어머니 산소에 벌초를 하러 나서기만 하면 비가 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해에도 추석을 1주일 앞 둔 일요일에 비가 왔다. 제법 굵은 비였다. 그 상태에서 비를 맞으며 벌초를 하기에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조금 피곤하더라도 추석 전날에 모두 모여 어머니 산소 벌초를 하기로 약속했다.

근데 이게 웬일일까. 추석 전날에도 어김없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었다. 이젠 더 이상 미룰 날짜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 해에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1회용 우비를 입고 진종일 땀과 비에 젖으며 벌초를 했다.

"내년부터는 2-3주 전에 미리 벌초를 하입시더"

"2-3주 전에는 종중 벌초를 한다 아이가. 내가 종중 회의를 할 때마다 그랬다 아이가. 다들 집안 벌초가 있으께 종중 벌초를 조금 일찍 하자꼬. 하지만 해마다 그래 해 온 관행인데 그게 쉽게 바꾸어지것나."

어머니 산소에 벌초를 하러 가는 길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벼는 볼이 터지도록 쌀알을 머금고 태풍 '루사'를 한없이 비웃고 있다. 마치 수재민들의 가슴앓이를 풍년으로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이. 군데군데 쓰러진 벼포기들도 모두 부지런한 농민의 손에 의해 모두 당당하게 일어서고 있다.


a 누렇게 잘 영근 벼

누렇게 잘 영근 벼 ⓒ 이종찬

알알이 영근 벼알갱이에서 뚝, 뚝, 떨어지는 하얗고 동그란 물방울, 물방울. 연초록빛을 띠며 익어가는 감과 감나무 잎사귀에서도 투두둑, 투두둑 떨어지는 하얗고도 동그란 물방울, 물방울. 그때 풍경처럼 열심히 산길을 올라가던 조카가 비릿한 비내음을 풍기며 이런 말을 툭 던졌다.

"삼촌! 벼는 익을수록 저렇게 고개를 숙이지만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네요?"


"짜아슥! 그래서 어쩌겠다는 긴데? 니도 커서 보리처럼 다른 사람들한테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 이 말이가?"

"아뇨. 꼭 그런 뜻은 아니지만..."
"짜아슥! 어디 쌀하고 보리하고 품질이 같더나?"

어머니 산소로 올라가는 길목부터 우리는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 제초기에서 나는 소리는 마치 보리타작을 하는 소리를 연상케 했다. 큰 형과 둘째 형이 각각 제초기 한 대씩을 메고 먼저 풀과 여러 가지 잡초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잘린 풀들을 치우고 간혹 남겨진 잡초들을 낫으로 대충 치는 일뿐이었다.

돌이 튀고 나뭇가지가 튀어 조금 위험하기는 했지만 제초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금새 어머니 산소가 보였다. 근데 어머니 산소가 보이는 입구에 가시가 숭숭 솟아난 이상한 나무가 있었다. 한 잎사귀에서 다섯갈래의 손가락이 나뉘어져 있었다.

"이 나무가 그 유명한 가시오가피 아이가?"
"아이다. 내가 알아봤는데 그건 코나무라고 카는 기다."
"내가 보기에는 가시오가피가 맞은 것 같은데."

어머니 산소가 있는 이 산에는 일반 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나무가 많았다. 발에 채이는 것이 산초나무였다. 산란도 눈에 흔히 띄었다. 그리고 산수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약초에 쓰이는 나무가 많았다.

"벌써 꾼들이 우리 산 곳곳을 몇 번씩이나 뒤졌다 아이가. 저거 봐라. 마구 다 파 뒤집어 놓았다 아이가. 하여간 요즘 눈 밝은 그런 넘들한테 알려졌다 카모 남아나는 기 없다 아이가. 산소 입구에 있는 저 나무가 가시오가핀지 뭔지는 잘 몰라도 저렇게 커서 하늘을 덮고 있으니까 눈에 띄지 않았다카이. 우리도 저 나무가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아이가."

a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 ⓒ 창원시

"면경알맨치로 깨끗하게 닦아놓았구먼" 오후 3시. 예상 외로 일찍 벌초가 끝이 났다. 우리 형제들은 저마다 그렇게 한마디 씩하며 스스로의 노력에 감탄했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 산소에 절을 올린 후 막걸리 한사발을 나눠 마시며 비안개에 젖은 주남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제법 물이 가득 찬 주남 저수지. 주남 저수지는 저수지가 아니라 마치 큰 강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자식처럼 딸린 동판 저수지 위로 백로 몇 마리 한가로이 비안개 속을 헤집고 있었다.

이제 이렇게 추석을 쇠고 나면 곧 가을이 저물 것이고 그와 동시에 저 저수지를 보금자리 삼아 세계 각처에서 온갖 희귀한 새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가리며 날아들겠지. 그리고 또다시 생존권을 주장하는 농민들과 철새보호를 주장하는 환경단체들 간의 지리한 싸움도 시작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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