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무치는 생존의 원리인가?

등록 2002.09.17 09:59수정 2002.09.1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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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덕목'들에 대한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생각 자체가 그를 가장 사람답게 하는 품성의 요체일 수도 있고,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참 가치관은 그에게 인생 경영의 기본 틀로 작용하면서 감히 인간 완성을 추구하는 결정적인 요체로도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깊고 넓게 생각하는 품성과 가슴에 품은 가치관을 올곧게 갈고 닦는 삶의 자세는 그에게 늘 높은 정신과 바른 이상을 갖게 하고, 거기에서 발원하는 삶의 향기는, 상황에 따라서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삶의 향기나 감히 인간 완성을 추구하는 일은 언제나 유형무형의 한계에 직면한다. 남들과 똑같지 않은 삶의 자세나 진정한 가치관 추구 노력은, 때에 따라서는 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핍박과 수난의 빌미가 되기도 하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진정한 가치관과 인간 완성 추구 노력은 언제나 갈등의 바다 험난한 파도 속에서 부침을 거듭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여기에 인생의 한계가 가로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 완성 추구 노력은, 그 노력 자체에 모든 의미와 가치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노력의 성사 여부, 즉 어떤 결정적인 상황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 노력은 이 세상에서는 완전하게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참으로 그것은 신의 눈앞에서나 성립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노력 자체에 대한 결정적인 판별 역시 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높은 정신과 이상, 교훈의 금자탑을 쌓은 동서고금의 기라성 같은 위인들 역시 그 인생 업적은 오로지 인간 완성 노력의 실상이나 한 과정일 뿐이다. 그것의 결정적인 가치 평가, 궁극적인 열매는 어디까지나 신에게 속한 사항이다. 우리는 많은 위인들의 업적이나 삶을 통해서, 오히려 신의 그림자를 더 많이 느끼기도 한다.

이런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의 눈을 곧추세우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이승의 한 순례자임을 늘 자각하곤 한다. 나그네의 소명에 충실한 것이 세상을 잘 사는 길임을 바르게 헤아린다. 진실과 정직이 중요한 요소인 겸허의 세계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그에게는 이승에서의 자신의 삶을 저 신의 세계로 향달시키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나그네의 겸허한 마음과 눈으로 늘 하늘을 우러르며 살려고 한다. 감히 하늘을 우러르되 적극적으로 우러르려고 하고, 적극적으로 우러르되 언제나 조심하며, 자신이 감히 하늘을 우러를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거듭한다. 때로는 영광된 마음으로 기쁘게 하늘을 우러르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차마 절대로 하지 못한다.


점점 세월을 넓히며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이승에서 추구할 수 있는 진정한 가치 덕목들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일찍이 사람이 지닌 마음 중에서 가장 고귀한 마음은 무엇일까에 깊은 관심을 가져보았다. 조물주께서 오로지 사람에게만 주신 마음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오로지 사람에게만 있는 가장 고귀한 마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도 한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오늘 다시 한번 반추한다. 감사지정과 측은지심과 수치심을….


남의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이웃의 불행이나 어려운 처지를 측은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헤아리는 마음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런 마음들이 이 세상을 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고 참되게 풍미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을 신의 세계로 향달시킬 수 있는 길임을 깊이 명심한다.

그런데 인간만의 이 고귀한 세 가지 마음 중에서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가장 취약한 것은 아무래도 수치심이 아닐까 싶다. 고귀한 세 가지 마음 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수치심일지도 모르는데, 통찰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수치심의 상실이 인간의 역사를 얼마나 어둡게 만들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어두운 역사는 곧 수치심 상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도 부분적으로는 수치심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의 실종 사태가 우리의 삶을 내면적으로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은, 우선 나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시대와 민족공동체를 포괄하는 오욕에 대한 성찰은, 우선은 나 자신부터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여러 가지 마음을 포괄하거나 연대한다.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과 진정한 자존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거짓이다. 가식, 과장, 기만, 억지, 강변, 호도, 분식, 만용 등을 포괄하거나 그것으로 쉽사리 이어지는 거짓은 또 곧잘 과대망상과도 동무를 한다.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일러 우리는 '후안무치'라고 부른다. 후안무치 현상은 비극적 현상의 다른 이름이다. 비겁함과 치사함과 무분별의 표본이기도 한 후안무치 현상은 우리 국가공동체의 삶 안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적으로 오욕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후안무치 현상은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인 지식인들에게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일제 이후로 참으로 오래 완강하게 이어져 온 후안무치는 이미 일부 정치인과 언론인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굳건한 생존 원리가 되어 버렸다.

작금에 우리의 삶 안에서 횡행하고 있는 후안무치의 세목들을 들자면 가장 먼저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아들들의 병역비리와 은폐 의혹을 둘러싼 억지와 강변들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 해결은 오늘 우리가 도저히 그대로 비켜가거나 묻어둘 수 없는 참으로 중요한 과제다. 이 일은 국가 정의의 기틀을 다시 세우고 민족 정기를 새롭게 하며 미래 역사를 참되게 만들어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역사 발전의 중대한 시금석이기도 하다.

국민들에게 모범적인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범법의 혐의마저 지고 있는 사람이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단순히 누가 대통령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체 국민들에게 진정한 국가 정의, 참된 역사 창조의 길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국가와 사회의 양심을 이끌어가야 할 지도층 사람들이 다시는 그런 비겁한 비리나 음성적인 범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역사 발전의 중대한 계기와 맞물려 있는 일인 것이다.

민주국가 최고 지도자의 진정한 권위는 도덕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그 상식에 반하는 권위는 진정한 권위가 아닐뿐더러 자칫 국가 사회에 후안무치 현상과 냉소주의를 확산시킬 우려가 크다. 물리력에만 의존하려는 권위는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이고 한나라당이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후보의 병역 비리 문제에 대한 검찰 수사가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서 선거대책위원회 발족 같은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것이 도덕적으로 과연 온당한 일일까? 그런 비상식의 기반 위에서 행해지는 말들, 부패정권 심판이니, 공작정치 청산이니, 새 역사 창조니 하는 말들은 너무도 공허하다. 지역감정 따위 저급한 정서에 얽매여 있지 않은 사람들, 진실과 정의와 상식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공허한 말들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대선 고지를 향해 맹렬히 돌진할 수 있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국민을 호도할 수 있는 길은 아직 무한히 열려 있다. 국민들 속에는 이회창 후보의 병역 비리 의혹 자체보다는 검찰 수사를 문제 삼는, 본말 전도의 시각이 엄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은밀히 공공장소에다 똥을 싸놓고 덮어놓은 일 자체보다는,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일을 더 문제 삼는 시각인 것이다. 만약 그 똥이 실재한다면, 그 똥을 치우는 일과 다시는 아무도 거기에 몰래 똥을 누지 못하게 하는 일이 사회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지적하는 논법들에 대항하여 한나라당 사람들은 좀더 전진적이고 노골적인 방어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엊그제 텔레비전에서 들은 이규택 한나라당 원내 총무의 발언은 놀라운 배짱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회창 후보 아들들에 대한 검찰 수사는 처음부터 철저히 조작된 것이고 완전히 날조된 것이기 때문에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우리 당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발언이었다.

여기에서 이규택 의원 발언의 진실성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검찰 수사의 조작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식의 방어전략과 방침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검찰 수사를 철저히 조작으로 몰아가고 수사 결과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복안이 있었기에, 그것으로부터 이회창 후보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도 가능할 수 있었고, "아들들의 병역 비리와 은폐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공언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검찰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그것을 얼마든지 조작으로 간주하고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있는데 하늘 우러러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으며, 대선 후보를 사퇴하는 일이 올 리 있겠는가.

그들의 그런 복안에 근거하여 젊은 남경필 대변인이 검찰 수사에 대해 "혹세무민하여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짓"이라고 하는 난폭하기 짝이 없는 발언도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런 발언을 듣는 순간 나는 혹세무민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구나 생각하면서 젊은 남경필 의원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후안무치에는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저 일제시대 친일 세력으로부터 연유하여 '반민족특위'를 때려부순 이승만 정권을 거치고 참으로 오랜 동안의 군사독재 정권 시절을 살아오는 동안 특히 정치인들의 후안무치 습성은 관성의 성곽을 높이 쌓아왔다. 자기 집단의 이익 앞에서는 더더욱 그들의 후안무치 습성이 극도로 발휘된다. 그들의 후안무치 앞에서는 국가도 민족도 미래 역사도 안중에 없고, 사회 공동선에 대한 아무런 분별도 없다. 오로지 배짱과, 패권을 위한 투쟁만이 중요하고 또 필요할 뿐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와 상식은 이제 그들의 쓰레기통 속에도 없다. 완전히 실종되어 버린 그 평범한 진리와 상식을 되찾아주는 일은 절대적으로 국민의 몫이다. 완강하고 도도한 후안무치, 그들의 생존 원리가 되어버린 파렴치와 싸우는 일은 너무도 힘이 든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제 우리 시대의 참혹한 후안무치 현상을 명확히 직시해야 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판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사람들에게 정치배가 아닌 참 정치인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아들들의 병역 비리와 은폐 의혹 문제는 결코 대선 관련 사항으로만 국한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정기, 사회정의 문제와 직결되는 참으로 중대한 사안이다. 우리는 오늘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온 국민이 진실과 정의와 상식을 숭앙하는 백성으로 다시 깨어나느냐, 그리하여 공명정대한 미래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디딤돌을 놓느냐 하는 기로에 우리는 지금 처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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