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조선일보>가 말할 차례"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등록 2002.09.22 18:28수정 2002.09.2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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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규 기자가 원래 보내온 기사의 제목은 "<조선일보>여, '아가리'를 열어라"였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원제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여러가지를 감안, 편집자의 재량으로 제목을 손봤습니다. 제목 정도는 편집자가 손댈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내용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제목과 관련된 내용이 본문에 별도로 언급돼 있기 때문입니다....<편집자 주>


내가 이렇게 ‘험악한’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조선일보>는 얼마 전 사설을 통해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책이 무엇인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입장을 밝혔고 대부분의 언론이 이 결정에 대해 나름의 논평을 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가장 먼저 정부의 입장을 요구했던 <조선일보>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어떠한 구체적 태도도 밝히지 않고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조선일보>의 이러한 모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정부에 대한 <조선일보>의 요구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밝혀두거니와, 이 글의 제목은 <르 몽드>에 실렸던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와 독일의 작가인 귄터 그라스의 대담에서 빌어온 것이다.

그들은 당면 사회문제를 외면하는 지식인들을 향해 “아가리를 열라”고 외쳤다. 비록 듣기 아름다운 제목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선일보>만큼은 이것을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고 믿는다.

기자의 이런 확신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 달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인 김광일은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없이 그대로 베껴 썼다가 문제가 되자 그것이 “혼성모방(pastiche)” 기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글의 제목 역시 포스트모던한 “혼성모방”정신에 입각한 것이므로 아무쪼록 <조선일보>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더군다나 기자는 출전까지 밝히고 있지 않은가.


조선일보 9월 16일자 사설
조선일보 9월 16일자 사설
<조선일보>는 9월 15일자 사설에서 정부를 향해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미군 아파트 숙소문제부터 미군 범죄에 이르기까지 현정부의 입장을 신랄하게 비판해 온 것이 <조선일보>였기에 마땅히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것으로 기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 표명이 있은 후에도 <조선일보>는 구체적인 입장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제 <조선일보>가 태도를 밝힐 차례다.


사실 한국 정부로서는 섣불리 입장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부가 미국에 보여온 태도를 고려할 때 파병 요구를 쉽게 물리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일방노선에 대한 국제적 시선이 곱지 않을 뿐 아니라, 국내의 여론 역시 미국의 태도에 비판적인 상황에서 한국정부는 최후의 순간까지 입장을 보류하고자 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현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밝히든 한국정부로서는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게 소위 ‘외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철딱서니 없게도 정부를 향해 태도를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나는 이 시기에 정부의 입장을 요구한 <조선일보>의 의도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한국 정부는 (어리석은 결정이었지만) 일단 입장을 밝힌 이상, 국제 여론이 미국을 돕지 않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더라도 우리 정부로서 입장을 번복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게 소위 “우익”을 자처하는 <조선일보>의 수준이다. 걸핏하면 “민족”과 “국민”을 표방하는 한국의 신문이 자국의 이익은 내팽개치고 열강의 꽁무니만 쫒아다니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국도 채 요구하지 않은 사항을 ‘우국지’를 자임하는 신문이 앞서서 요구했다는 사실은 한 편의 코미디다. 그러나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정부의 입장을 요구했던 그 신문사가 정작 자신의 입장은 단 한 번도 분명히 드러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입장을 밝히라고 으르렁댔던 신문이 자신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조선일보>가 밝히지 않아도 그 신문의 입장은 이미 밝혀진 거나 마찬가지다. <조선일보>의 김대중이 주필 자격으로 쓴 “어느 편에 줄을 설 것인가”라는 글이 <조선일보>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글을 일부 인용해 보기로 하자.

“9.11 사태 이후 국제 질서가 재편되면서 한국은 나라의 장래를 가름하는 중대한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우리는 이른 바 문명권과 이에 도전하는 질서, 둘 중에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 미국의 이런 자세가 옳으냐 그르냐의 가치판단 문제는 별개로 이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며 우리처럼 미국과의 관계를 중대한 변수로 지니고 있는 나라는 가타부타 이전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 김대중 칼럼 “한국, 어느쪽에 설 것인가?” <조선일보> 2001년 12월 29일자


그렇다. “가타부타”할 것없이 미국에 협조하라는 것이 바로 이 신문의 입장이다. 옳든 그르든 열강쪽에 줄서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일보>의 논리다.

사실 이 논리는 <조선일보>의 생존철학이기도 하다. 옳든 그르든 간에 힘있는 자 뒤에 줄서야 한다는 이 논리가 <조선일보>로 하여금 일제시대에는 일본에 줄서고, 군사독재 시대에는 독재자에게 줄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난 이 입장에 대해서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이것이 한 기업의 가련한 생존방식일망정, 조국에 자랑스럽게 권할 만한 것은 못 된다고 말하고 싶다. 게다가 이게 고작 “할 말은 하는” 신문의 기업윤리라면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조선일보>의 김대중은 계속해서 말한다.

“‘한국에 아프간 파병을 요청했을 때 이리 저리 꽁무니를 빼더니 막판에 겨우 지원병을 보낸다고 생색을 내지 않나. 미군 주둔지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오래전에 요청했는데도 뒤늦게 이제와서 건립반대 데모를 동원하지 않나 – 하느니 미국신경 건드리는 일만 골라서 한다’는 것이 전직 한 외교관의 솔직한 걱정이다. … 지금 우리나라에는 ‘미국과 문명권의 이익’보다는 민족적 정서가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궁금해진다. 미국이 현재 벌이고 있는 전쟁을 기껏 “문명권”과 “이에 도전하는 질서”로 파악하는 그의 안목도 한심하지만, 민족의 “이익”을 그렇게 걱정하는 신문이 갑자기 한국 정부에 대해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한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조선일보>가 당당하다면 그렇게 회색지대에 비굴하게 숨어있지 말고 당당히 나와서 “문명권에 줄서서 이라크를 공격하라”고 외칠 일이다.

<조선일보>여, 이제 아가리를 열어라. 그대의 입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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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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