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디 머스마, 얄궂기는..."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1> 망개

등록 2002.09.26 14:45수정 2002.09.2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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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야생화연구소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 뚝! 떨어질 것 같은 짙푸른 가을 하늘... 티 한점 없는, 아니 티가 있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그 하늘 아래... 잘 익은 고추처럼 꽁지가 빠알간 고추 잠자리 열서너 마리... 날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그대로 정지되어 있다.


"잠 깸 뽀이..."
"잠 깸 뽀이..."
"잠 깸 뽀이..."

어디선가 '가위 바위 보'를 외치는 소리가 졸음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그랬다. 우리는 '가위 바위 보'를 '잠 깸 뽀이'라고 했다. 이 '잠 깸 뽀이'란 말이 순수한 우리나라 말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 말인지는 잘 모른다. 하여튼 우리는 그렇게 삼세판을 해서 왕과 왕비를 선출했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신하와 시녀들이 되었다.

"니가 영의정 해라."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나이다. 전하!"
"니는 속히 신하들과 시녀들을 시켜 신임 국왕인 나와 왕비를 위해 왕관과 혁띠 등을 만들되,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게 만들도록 하여라-"
"예에-"

해마다 가을이 깊어가면 우리 또래의 마을 아이들은 누구나, 그러니까 가시나 머스마 할 것 없이 모두 '앞산가새'라 불리는 야트막한 마을 앞산에 올라가 왕 놀이를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를 파하면 누구나 무슨 가정의례준칙처럼 소를 먹여야 했고, 소풀을 한 짐씩 베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마을 아이들은 앞산가새로 몰려들었다. 앞산가새에는 들국화를 비롯한 쑥부쟁이, 싸리, 억새꽃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혀끝을 농락하는 망개, 깨금, 도토리, 어름, 다래, 산머루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또 소가 좋아하는 바랭이 풀도 많았다. 말하자면 앞산가새는 우리 마을 아이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보물섬이자 우리 마을 아이들의 자치국이었다.

a 어린 청미래

어린 청미래 ⓒ 이종찬

망개. 한방과 민간요법으로 임질과 소화 등을 다스리는 데 흔히 쓰이는 약재인 그 '청미래 넝쿨'을 우리는 망개 넝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왕관과 혁띠를 만들 때 반드시 쓰인 재료가 바로 망개 잎사귀였다.


하트 모양을 한 망개 잎사귀는 다름 잎사귀보다 조금 두터웠고, 거셌다. 망개 잎사귀로 왕관과 혁띠를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먼저 망개 잎사귀를 따놓은 뒤 흔하디 흔한 싸리나무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내 망개 잎사귀를 엮다가 치수를 재서 매듭만 지으면 그만이었다.

그 망개 잎사귀로 만든 왕관과 혁띠는 보기에도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지천에 널린 게 망개 넝쿨이었기 때문에 따로 재료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또 왕과 왕비 이외에는 손목에 조그마하게 망개 잎사귀를 엮어 팔찌처럼 끼우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산 구석구석을 헤매며 깨금, 도토리, 다래, 어름 등을 따와 왕에게 바쳐야 했다. 그러면 왕이 각종 열매들을 신하와 시녀들에게 골고루 분배를 해주었다.

왕과 왕비가 앉는 자리도 달랐다. 왕과 왕비가 앉는 자리는 망개 넝쿨이 잘 어우러진 시원한 곳이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빨갛게 잘 익은 망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신하와 시녀들은 그 망개 열매 근처에는 얼씬대지도 못하게 했고, 당연히 맛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빨갛게 잘 익은 그 망개 열매는 그 날 뽑힌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그리고 왕과 왕비만이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레꼴레리... 얼레꼴레리..."
"니캉내캉... 니캉내캉..."
"응응한다네... 응응한다네..."

그 날도 나의 왕비로 뽑힌 그 가시나는 우리 마을에서 그래도 낯빤데기가 제법 뺀데그레(?)하다는, 그러니까 제법 예쁘다는 평을 받고 있는 그 가시나였다.

당시 나는 이상하게 그 가시나와 자주 짝꿍이 되었다. 어쩌다 다른 놀이를 할 때에도 툭 하면 그 가시나가 내 짝꿍이 되곤 했다. 당시 가장 예쁘게 잘 익은 망개 열매를 그 가시나에게 준 기억이 있는 걸로 보아 나 역시 그 가시나가 그리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망개 열매는 빨갛게 익었을 때 먹어야 달착지근한 게 맛이 있었다. 마치 잘 익은 까치밥 맛과 비슷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새파란 망개는 몹시 떫고 쓴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이 나자 갑자기 짖궂은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스물스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도 내 짝꿍이 된 그 가시나, 망개 왕관을 쓰며 볼그스럼한 볼을 붉히던 그 가시나가 제법 이뻐 보였다. 갑자기 이쁜 그 가시나를 콱 깨물어주고 싶었다.

a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청미래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청미래 ⓒ 전라도야생화연구소

"니 쪼매만 눈 좀 감아 보거라."
"와?"
"니한테 선물 하나 줄라 안카나."
"머슨 선물인데에?"
"가시나, 눈부터 감아보라 카이."
"......"
"......"
"아..."
"아..."

그랬다. 나는 미리 준비한 새파란 망개 열매를 한웅큼 손에 쥐고 눈을 꼬옥 감고 있는 그 가시나한테 아, 했다. 즉 입을 벌리라는 말이었다. 그러자 그 가시나도 아, 하고 그 조그마하고 예쁜 입을 살짝 벌렸다. 내가 한번 더 크게 아! 하자 그 가시나도 따라 아! 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때 나는 잽싸게 그 새파란 그 망개 열매를 그 가시나 입 속에 가득 넣은 뒤 손으로 그 가시나 입을 꼬옥 막았다.

"뭐- 뭐꼬?"
"씹어봐라, 맛이 기가 막힐 끼다"
"......"
"......"
"퉤! 퉤! 아이 떫어."
"속았지롱, 속았지롱."
"문디 머스마, 얄궂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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