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이는 역시 나의 '보람'입니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기에 아름다울 수도 있다"

등록 2002.10.01 06:59수정 2002.10.0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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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 제자로부터 반가운 메일 편지를 받았습니다. 반갑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온 힘을 다해 피시방을 향해 뛰었던 것 같습니다. 급하게 타전되어온 글자에서 뿌연 입김 같은 것이 피어나는 듯한 묘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전문 내용은 다름 아닌 백일장 대회에서 산문부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승전보였습니다.

보람이는 작년 담임 반 아이입니다. 올해 제 생일날, 제가 아이들에게 해준 그대로 생일 축시를 직접 써서, 뒷면에선 반 전체 아이들의 축하 글을 담아 코팅하여 선물로 전해준 바로 그 아이입니다. 한때는 저를 아버지라 부르기도 했던 그 아이가 저에게 첫 메일을 보내온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부모가 이혼한 후 거리를 방황하다가 담임인 저에게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작년에는 그 아픈 이야기를 글로 담아 백일장 대회에 출품을 했는데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심사위원이셨던 공선옥 소설가가 보람이의 글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전라도 닷컴>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며 느낀 것은 요즘의 어른들 세계가 아이들의 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었다. 유독 눈에 띄는 건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에 또는 어른들의 폭력 앞에서조차 아이들 특유의 맑은 마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그 얼마나 따뜻한 어른의 말 한마디를 갈구하는지를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아이는 집을 나왔다. 엄마 아빠가 이혼을 했는데 엄마는 아이더러 아빠한테 가 살라 하고 아빠는 엄마한테 가 살라 하니 아이는 이쪽저쪽을 왔다갔다하다가 결국 갈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이는 시골의 할머니한테 갔지만 할머니는 아이를 거두어서 키울 만한 여력이 없다. 아이는 그리하여 거리의 아이가 되었다.

거리를 휩쓸어 다니다가 밤이 되어 갈 곳이 없어진 아이는 피시방에 들어가 하룻밤을 의탁한다. 그곳에서 담임선생님에게 메일을 보낸다. 담임선생님이 아이에게 답장을 보내왔다. 아이는 선생님이 제게 답장을 보내온 사실만으로도 비록 거리의 아이가 됐지만 마음조차 함부로 놓아버리지는 않을 만한 용기를 얻는다.'


이번 글에도 아픈 가족사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글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글을 매끄럽게 마무리할 줄 아는 기술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괴롭혔던 많은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걸러진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목은 주최측에서 정해준 것이라고 합니다. 보람이의 글을 소개합니다.


휴대폰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가을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나는 소리 없는 작은 미소로 대신할 만한 어릴 적 작은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 가족은 양복 일을 하시는 아버지, 식당 일을 하시는 어머니, 나와 두 살 차이나는 오빠 그리고 욕심 많은 나까지 네 식구였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있어 옷을 만드는 멋진 분이셨지만 무엇 때문인지 아버지는 한 가지 일에 만족하지 못 하고 일을 해주고도 돈을 제대로 받아오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식당 일을 하시는 어머니의 월급으로 우리 집은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날엔 겨우 얻은 사글세 방 마저 빼줘야 할만큼의 지경도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항상 부모님의 싸움은 늘어만 갔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밝게 자라는 오빠와 내가 예뻤던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두 남매가 기죽는 건 보지 않으셨다. 돈을 빌려서라도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은 모두 사주시는 편이었다. 그런 부모님 때문에 나는 지금 가슴아픈 상처 하나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철없던 나이 중학교 2학년이었던 오빠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의 귀에 대곤 작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 휴대폰 사줘! 다른 친구들은 다 있는데 나만 없어!"라며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어머니는 "아빠 알면 어쩔려고 그런 소리 해!! 안돼!!"라며 오빠를 꾸짖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오빠의 눈물공세가 시작되었다.

오빠는 휴대폰을 꼭 사야겠다는 식이었고 아주 작정을 하고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속상한 마음을 뒤로하신 채 얼굴엔 굳은 인상만 가득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이 아닌 돈이 없어서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밖에 되지 않았던 난 휴대폰을 갖고 싶어하는 오빠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은 어른들만 써야 한다는 내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했고, 그 휴대폰이 얼마나 비싼 건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오빠를 약간 흘겨보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오빠의 눈물공세작전이 성공한 것일까?? 오빠 손엔 전화선 하나 달리지 않은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고 입은 거의 귀에 걸린 상태였다. 어머니도 오빠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마냥 웃고만 계셨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그 얼굴을 기억한다. 그래서 가끔은 어머니의 그 표정을 따라해 보곤 한다.

아버지도 몇 차례 화를 내셨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셨다. 나는 버럭 화가 났다. 학교에서 "차별"이라는 단어를 알게되고 나는 더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제나 용돈도 오빠가 더 많았고, 새 옷도 오빠 것이 더 비싸고 좋은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차별이라 생각했다. 아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휴대폰이 조금은 갖고 싶어서 화가 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괜한 트집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나를 달래주셨다. 어렸을 적부터 웃음이 많았던 나는 항상 웃음이 입가에 떠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너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라며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웃음이 많던 내가 우는 게 어머니는 이해 할 수 없이 답답하셨던지 "우리 보람이 왜 화를 내니?"라며 엉덩이를 토닥이셨다.

나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흐느끼며 말했다. "엄마는 맨날 오빠만 잘해주고, 오빠만 용돈도 많이 주고, 옷도 맨날 오빠 입던 것만 나주고 오빠는 휴대폰도 사줬잖아! 나는 맨날 오빠 보다 조금밖에 안주고 엄마 나뻐!"라며 어머니의 마음을 울렸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약속 하나를 해주셨다. "우리 보람이도 엄마가 중학생 되면 해달라는 거 다 해줄께 약속해"라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나는 어머니를 믿고 울음을 그쳤다.

그렇게 약속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채 2년이 흘러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원하는 순천여자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아마 난 어머니를 위해서 공부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집에 불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가출과 함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돈 한푼 벌어다 주지 않고 술만 드시는 아버지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견디지 못해 나와 오빠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더 미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세 식구로 할머니 댁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싶어도 나는 오빠를 봐서라도 웃고 다녔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변함없이 현실에만 힘들어 할 뿐 술을 먹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일은 여전히 지속되어갔다.

그렇게 2년이 흐르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비록 내가 가고 싶은 고등학교는 아니었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면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기 초에 적응을 잘 못하고 방황을 했다. 집에도 학교에도 가지 않고 나는 친구와 밖을 나돌았다. 그렇게 4일을 방황하다 아버지에게 잡히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저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요. 엄마한테 보내줘요!"라며 졸랐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아버린 상태였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다. 그렇게 긴 방황 끝에 나는 어머니에게 보내졌다. 어머니... 그토록 보고싶었던 어머니를 보니 너무나 서글퍼서 눈물을 마구 흘렸다. 어머니도 많이 핼쓱해져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사는 단칸방에 가게 되었다. 작은 살림살이들이 있는 그 곳은 어머니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내가 그렇게 먹고 싶었던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차에 나는 어머니에게 마음속 깊이 새겨뒀던 약속을 꺼냈다. "엄마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나 중학생 되면 해달라는 거 다 해준다고 해놓고 왜 나를 떠났어! 엄마...근데 나 괜찮아..이제..휴대폰 같은 것도 필요 없어!! 엄마랑 이렇게 같이 있잖아..휴대폰 따윈 필요 없어!!"라며 어릴 적 그때와 같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보람아 미안해...엄마가 정말 미안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1년 반이 흐른 지금도 나에겐 휴대폰은 없다. 정말 필요 없어서가 아닌..내가 정말 갖고 싶은 걸 얻었으니..그 이름 어머니...그런데 휴대폰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잃어버린 아버지와 오빠 생각에 말이다. 어릴 적 나의 한쪽 가슴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 하나..휴대폰의 약속..하지만 나는 웃어본다. 그리고 상처는 지워지지 않기에 아름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기에 아름다울 수도 있다'

아, 이 마지막 문구를 저는 한 번 더 읊조려 봅니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얼마나 또 아팠을까요? 하지만 저도 이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보람이는 저의 보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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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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