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이가 거짓말을 하던 날

'자기 신화'를 깨뜨리는 연습

등록 2002.10.03 05:44수정 2002.10.0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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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겠습니다."

학교를 다녀오겠다는 아들아이의 인사부터가 어딘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현관 앞에서 뽀뽀 부라보를 하든지, 아니면 뭐라고 새살을 까면서 늑장을 부리다가 제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고서야 부랴부랴 집을 나섰을 터인데, 오늘 아들아이의 행동거지는 그게 아니었다. 평소 하던 이런저런 절차도 없이 바지에서 방귀 새어나가듯 몰래 집을 빠져나간 것이었다.

바로 그 시간, 나는 수업 시간에 사용하기 위해 늘 가지고 다니던 테이프 가방을 챙기다가 최근에 구입한 팝송 테이프 한 개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아이의 소형 카세트도 늘 있던 제 자리에 없는 것이 확인되자, "카세트를 이 녀석이 가져갔나?"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그 소리를 아내가 들었는지 곧바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 아들아이를 부르는 것이었다.

언젠가 아들아이가 소형 카세트를 학교에 가져갔다가 잃어버린 뒤로는 절대로 카세트를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않기로 약속을 했던 터였다. 잠시 후 아들아이와 나는 아파트 관리실 앞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카세트 가져가니?"
"아니요."
"네 방에 없는데."
"아빠 방에 있어요."
"아빠 방에도 안 보이는데."

"공부하다가 땅에 떨어졌어요. 책꽂이 밑으로 들어갔나 봐요."
"그래!"
그런데 아들아이를 보내고 다시 올라와 아내와 함께 아무리 방을 뒤져봐도 소형 카세트는 눈에 띄지 않았다. 더욱이 아들아이가 말한 책꽂이 아래쪽은 바늘이 들어가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아들아이가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내와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시선을 허공 어디쯤 두고 망연히 서 있을 도리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아파트 관리실 앞에서 마주친 아들아이의 눈빛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얘를 어떡하죠?"
아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나의 대꾸가 없자 아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괜히 물어봤나 봐. 물어 보지만 않았어도 거짓말을 안 했을 텐데. 이렇게 속이 상하지도 않고요. 사을이 저도 지금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 우리가 뻔히 찾아볼 줄을 알 텐데.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얘를 믿죠?"

나는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보다 이성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아내가 우선 다행스럽게 여겨지긴 했다. 사실, 아들녀석보다는 아내 쪽이 더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아내는 어떤 충격을 흡수하고 소화시키는 방면에는 너무나도 섬약한 구석이 있었다. 남편인 나에게나 당당하고 질길 뿐, 대인관계에서도 쉽게 상처를 받는 그런 편이었다. 그런 아내였기에, 평소와는 달리 이성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아슬아슬한 곡예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심리학 용어로 자기 신화라는 말이 있어. 복권을 사면 꼭 당첨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있잖아. 전쟁에 나가도 자기만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올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그렇고, 자기 자식만큼은 거짓말이나 못된 짓을 하지 않고 잘 자라 주려니 하는 기대 같은 것도 일종의 자기 신화라고 볼 수 있지. 그런데 그러한 자기 신화가 지나치면 자녀를 그르칠 수 있다는 거야."

여기까지 말하고 아내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을 뿐, 나는 좀더 이야기를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이렇게 말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요. 부모가 바라는 대로 자라 주는 아이가 어디 있겠어요? 지금까지 이만큼 잘 자라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렇게 큰 일도 아니네. 음악을 좋아하는 애가 그 동안 얼마나 카세트를 가지고 다니고 싶었겠어."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불안했던 마음들이 봄눈처럼 사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아내의 표정도 한껏 밝아져 있었다.
"나, 사을이 먼저 만나고 학교에 출근할게. 잘하면 늦지 않을 거야. 저도 맞을 매를 맞아야 편히 공부를 할 수 있겠지."
나는 출근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서 집을 나섰다. 아내는 내 등뒤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반성하면 이번만은 엄마도 용서하겠다고 전해줘요."

택시를 기다리면서 나는 몇 번이고 입 속에서 아내가 발음한 용서라는 말을 되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아들아이를 만나자 곧바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바로 그 용서라는 말이었다. 아들아이는 교실에서 아침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교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눈에 익은 한 아이에게 손짓을 하자 곧바로 아들아이가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들아이에게 나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널 용서하러 왔다."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내가 한 말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아이를 위해서 자기 신화를 깨뜨려 준 아내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것은 내 마음 한 편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쉽게 아들아이에 대한 자기 신화를 깨뜨릴 수 있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 동안 남편인 나를 만나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내게 걸었던 기대가 무참하게 허물어지면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누군가에 대한 자기 신화를 깨뜨리는 연습을 해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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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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