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닿은 한계령 넘어

등록 2002.10.05 10:56수정 2002.10.0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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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짐스럽다. 난폭한 말처럼 어지럽게 서로 발길질하는 말 세상. 나 또한 말의 죄인. 도시를 떠나자. 한계령으로 가자. 하늘 가 닿은 한계령 고개 너머 침묵의 영지로 들어가자.

대관령 너머 양쪽으로 올라가는 한계령 길. 지나간 여름 태풍 서슬에 길이 끊겼다. 산기슭이 허물어졌다. 쓸려 내려간 흙더미가 논밭을 덮쳤다. 산허리가 잘렸다. 뱃구레가 터져 창자가 비친다. 그러나 산은 상처투성이로 건재하다. 고고하다. 나는 엄한 산을 오른다.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엄지손가락 첫째 마디만큼 밖에 남아 있지 않던 엔진 오일 탓인지, 머플러가 터진 지 여러 개월 지난 탓인지, 말 빚과 글 빚 숱하게 도시에 남겨두고 떠나온 탓인지 자동차는 소금짐 진 당나귀처럼 힘겹게 한계령 고개를 올라간다.

어느새 산나무 잎들은 녹이 슬었다. 단풍이 들었다. 산허리 돌고 돌아 문득 다가선 거벽조차 붉은 녹물이 들었다. 저 굽이 아래 까마득한 낭떠러지 계곡 계곡마다 수심이 깊었다.

수심 깊은 초가을 빛이 눈부시다.

오지 말라는 뜻 어기대고 굳이 오르는 뜻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나 답은 없다. 홀로 가는 산길은 고적하다. 산이 툭 다가서서 길이 끊긴 듯한데 길은 이어진다. 짧은 가을 해 날 저무는 듯 그늘이 지다가 모퉁이를 돌아서면 빛이 다시 비친다. 아득아득한 한계령 1003.6 미터 고개 마루 오르니 아득한 내리막 길.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 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하루를 다해 이곳을 내려가면 인제, 홍천, 양평을 지나 다시 서울. 나는 떠나간 곳으로 되돌아간다. 내리막길 끝에 진부령 쪽으로 꺾어들면 용대리 백담사. 그곳 님의 침묵을 알현하고 선사의 죽비를 자청할까.


한계령을 한자로 쓰면 차디찬 계곡이라는 뜻의 한계령(寒溪嶺). 그러나 내게는 이 고개가 한계령(限界嶺)으로 보인다. 이 한계를 넘어야 하겠지. 말을 넘어 이르러야 할 침묵의 고개. 그리고 또 그 고개를 넘으면 어떤 말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련가.

한계령을 넘었는데 나는 아직 침묵에 이르지 못했다. 말없음에 이르지 못한 채 나는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서울이라는 이름의 아수라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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